가면의 남편 저자-캐롤 모티머(삼중당 문고) 워딩- lee 1장. 조던! 금발의 여성과 팔짱을 끼고 호텔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는 키가 크고 강인한 얼굴 생김새의 남자는 조던이었다. 샤리는 바짝 긴장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조던의 동반자는 금발이었지만 안젤라 디바인은 아니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안젤라는 벌써 오래 전에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조던은 올해 33세로 곧게 뻗은 콧날과 쏘는 듯한 잿빛 눈은 그를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로 보이게 했으며, 굳게 다문 입가에는 속을 품고 있는 격정은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조던과 금발의 여성이 프런트 데스크를 떠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을 샤리는 몰래 지켜 보았다. 언젠가 우연히 조던과 맞닥뜨릴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샤리로서는 아직 뜻밖의 재회에 견딜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5년 전 18세였던 샤리는 완전히 조던의 매력에 지고 말았다. 조용한 격정을 간직한 그를 샤리는 알게 된 지 한 달 만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7개월 후 유산과 더불어 영원히 조던의 아내이기를 바라던 샤리의 꿈도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의 일을 샤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병실, 죽음에의 예감. [안 됐습니다. 로드 부인. 최선을 다했지만 아기를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샤리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젊은 의사를 쳐다보았다. 머리속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아기라니, 누구의 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한잠 푹 주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사이 로드씨께도 돌아오실 테니까요.] 간호사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인 여기 안 계신가요?] 샤리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간호사는 담요로 샤리의 몸을 감싸 주면서 대답했다. [로드 씨께서는 가셨어요. 아마 회사로 돌아가셨나 봐요.] [그럴 테죠..] 샤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동의했다. 그녀가 고독해지는 건 언제나 조던의 사업 때문이었다. 눈물이 쏟아질 듯 해서 샤리는 얼른 얼굴을 돌리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잠이 오는 것 같으니 가보세요.] 내가 유산을 하다니!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 무서운 사실이 샤리의 머리에 칼날처럼 파고 들었다. 냉혹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샤리는 푸른 눈을 꼭 감았다. 조던은 회사에서 돌아왔을까? 아니면 이런 때에도 사업이 우선일까? 나는 병자가 아니라 단지 유산했을 뿐이니까...아기가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지만 조던은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샤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가슴 가득히 번져오는 공허함을 견디고 있었다. [샤리!] 얇은 네글리제 위로 조던의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쓸었다. 샤리는 어깨를 흔들어 그 손을 피하며 천천히 얼굴을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볼 일은 다 보셨나요?] 그녀는 쌀쌀하게 물었다. 조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샤리는 여전히 키크고 매력이 넘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6개월 전 샤리와 결혼하기까지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많은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당신은 잠을 자고 있었어. 내가 있었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야.] 조던이 어색하게 변명했다. [좋아요. 그런데 일은 다 보셨나요?] [난 사무실에 가 있었던 게 아니야, 샤리. 난..]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샤리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간호사 좀 불러 주시겠어요? 일어나서 앉고 싶어요.] 조던은 몸을 굽혀 샤리를 부축했다. 그의 늠름한 체구가 샤리를 압도하는 듯 했다. [등받이를 조절하는 동안 날 붙잡고 있어.] [싫어요!] 샤리는 몸을 움츠려 남편의 몸을 피했다. [누구든 좋으니까 아무나 불러 주세요. 당신 이외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요!] 조던은 가면처럼 무표정해지면서 냉큼 뒤로 물러섰다. [아기는 또 생길 거야. 샤리. 이번 일은 유감이지만 그러나..] [아뇨, 다시는 아기를 갖지 않겠어요.] 샤리는 손을 꽉 움켜쥐면서 겁먹은 어린애처럼 남편을 쳐다보았다. [이젠 끝장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맥없이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당신은 지쳐있어. 좀 자도록 해. 난 나갔다가 다시 올 테니까.] 조던은 달래듯이 말했다. [또 일이신가요, 아니면 안젤라가 보고 싶어서 사무실로 가시는 건가요?] 샤리는 비웃듯이 말했다. 조던의 잿빛눈이 험악해졌다. [안젤라? 내 비서 말인가?] 샤리는 입을 비죽거리며 냉소했다. [그 여잘 비서라고 부르고 싶으시다면, 그래요.] [당신은 몹시 쇠약해 있는 상태야. 아무 생각 말고 푹 자요.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 조던은 냉랭하게 명령하듯 말했다.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전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2주일 후라고 의사는 말했어. 하지만 당신 몸이 워낙 쇠약해서...] [제가 약해진 건 당신 탓이예요. 하지만 앞으로는 강해질 거예요.] 샤리는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던은 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기는 사내애였어요, 계집애였어요?] 샤리는 힘없이 물었다. [아기 일은 생각하지 마. 잊는게 제일이야.] 잊는다구? 아기에 대해서? 아마 아기를 잃은 그 이유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 쪽이었어요, 조던?] 샤리의 고집에 조던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계집애였어요.] [그렇담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르죠. 당신은 계집애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샤리는 고통을 감추려고 짐짓 비웃듯이 말했다. 조던은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샤리의 손을 잡았다. [아기보다 당신을 살리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샤리는 잡힌 손을 빼내며 차갑게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린 하지도 마세요. 전 좀 자야겠어요.] 샤리는 졸리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며 담요를 끌어당겼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어.] 조던은 체념하듯이 말했으나, 샤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문 닫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가버렸다. 참고 있던 슬픔이 왈칵 치밀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역력히 생각나는 그날 아침의 그 일-. 그날 아침, 샤리는 아기를 위해 구입한 옷가지를 조던에게 보이려고 행복에 가득찬 마음으로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비서는 자리에 없고 남편의 비서인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과 안젤라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소리... 샤리는 악마에게 쫓김을 당하듯이 그 빌딩에서 도망쳐 나와TEk. 샤리는 정신없이 뛰었다. 뱃속의 아기도 잊고. 갑자기 엄습해 오던 그 통증,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캄캄한 아픔에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샤리의 임신이 확실해진 날부터 조던은 그녀를 피해 왔었다. 그 이유가 아름다운 비서를 상대로 정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샤리는 앞으로 남편에게는 자기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했다. 샤리가 유산한 지 2주일 동안 두 사람은 병실에서 얼굴을 마주 대할 때에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퇴원하여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침묵을 지켰다. [어마, 아씨! 생각보다 건강하셔서 다행이군요.] 가정부인 마크로드 부인이 현관문을 열며 반색했다. [고마워요, 아줌마.] 6개월전 조던과 결혼한 이래 살림을 도와 온 가정부에 대해서도 샤리는 따뜻한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거실로 차 좀 갖다 주시오.] 조던은 무뚝뚝하게 명령하듯 말했다. 가정부가 주방으로 물러가자 샤리는 남편에게서 떨어져 거실로 들어갔다. 결혼 후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 거실에는 정이 들지 않는다. 회색 빌로도 커튼이나 검은 가죽 의자는 조던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포근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도대체 조던은 어째서 나와 결혼했을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 조던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니까. 그러나 내가 그의 프로포즈에 승낙한 것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랑도 유산과 더불어 죽고 말았다. 샤리의 아버지가 베푼 디너 파티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최초의 만남에서 조던은 샤리에게 매혹된 것 같았다. 그 파티 석상에서 샤리를 극장으로 데려간 뒤로 둘은 연일 데이트를 했다. 조던은 샤리를 어린애 취급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매일 밤 헤어질 때의 그 몸과 마음을 녹이는 듯한 키스를 기다렸다. 샤리가 아무리 졸라도 선뜻 응해주지 않았던 그 키스와 애무, 조던이 결혼 신청을 했을 때 샤리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샤리의 아버지는 조던의 청혼을 별로 환영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은 1개월 후에 거행되었다. 바르바도스 섬에서 보낸 신혼여행. 조던이 일깨워 준 열정적인 관능의 기쁨.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과 사랑이 넘치는 그 여행중에 샤리는 임신했다. 샤리는 꿈이 이루어져 기뻤지만 조던의 반응은 냉담했다. 밤바다의 정열에 넘친 포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이었을 것이라고 샤리는 멋대로 상상했다. 그렇더라도 조던이 아빠가 된다는 것을 안 그날 밤부터 전혀 자기 몸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오늘 밤 장인께서 저녁 식사 하러 오실 거야. 당신이 유산했다는 건 알리지 않았어. 장인의 미국에서의 연락처는 알고 있지만, 전화로 알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홍차를 기다리면서 조던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쇼크 받으시겠군요.]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실 테지.] 조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랐다. 샤리는 그런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에 벌써 위스키?] 잿빛 눈이 샤리를 힐끗 쳐다본다. [안 되나?] [별로.] 샤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당신이 이렇게 냉담하고 차가워진 이유가 뭐지? 물론 유산은 뼈아픈 체험이었지만..] [알아주셔서 고맙군요.] 샤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조던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샤리를 노려보았다. [나도 그렇게 둔한 남자는 아니야. 그러나 유산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큰 사건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예요. 조던.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샤리는 커트 글라스의 화병을 집어들고 그 차가운 아름다움을 감상하듯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열여덟이면 어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러나 난 당신의 순수한 정열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당신의 좋은 심심풀이가 됐겠지요.] [정말 왜 이러지?] 조던은 샤리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손에서 화병이 미끄러져 두 사람의 발 밑에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당신 때문에 아까운 화병만 깨졌잖아요.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정말 어떻다는 거지?]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샤리의 입술을 응시했다. 샤리는 얼른 뒤로 물러앉았다. [제 몸에 손 대지 마세요! 당신 손이 닿으면 몸서리가 쳐져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달링?] 사랑해 달라고 졸랐던 밤의 일이 생각나 샤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옛날 일이예요, 이제는..] [기다리셨지요, 차를 가지고 왔어요.] 가정부인 마크로드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들어오다가 깨진 화병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실수로 화병이 깨졌소.] [걱정마세요, 싸구려니까요.] 가정부는 글라스의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밀크, 레몬?] 테이블 앞에 앉으면서 샤리는 쌀쌀하게 물었다. [밀크,] [설탕은?] 아직 글라스의 파편을 줍고 있는 가정부 마크로드를 의식해서 샤리는 공손히 물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당신은 설탕을 타야겠어,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하니까. 마음에도 없는 조던의 그런 다정함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 친절하시군요, 아줌마. 이분처럼 아내를 끔찍하게 위해 주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그럼요.] 가정부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모두들 아씨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특히 주인님께서는 안타까울 정도로 걱정하셨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난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거든요.] 샤리는 가정부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야 그러실 테지만..그러나 몸조리를 잘 하셔야 해요. 그래서 주인님께 아씨를 어디 따뜻한 곳에 모시고 가서 정양토록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행을 권했었지요.] [여행? 글쎄..별로.. 지금은 집에서 쉬고 싶어요.] 샤리는 노골적인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조던과 둘만이 되는 곳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나도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여행은 나중에 가기로 하지.] 조던이 그 상황을 얼른 매듭지었다. 그는 비서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안젤라 디바인은 날씬한 금발 미인으로 샤리보다 열 살 쯤 위일 것이다. 그녀는 교묘하게 조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조던이 런던을 떠날 수 없다면 혼자서라도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 지금,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샤리는 가정부가 거실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자기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혼자서 여행이라도 다니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요.] [나와 함께라면 모르지만 당신 혼자서는 아무데도 못 가. 당신이 날 몹시 미워하고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당신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둘수는 없어.] 샤리는 벌떡 일어섰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내뱉고는 그녀는 침실로 향했다. 조던에게 임신을 알리고는 쭉 혼자서 쓰고 있던 침실이었다. 그러나 샤리가 문까지 가기 전에 조던은 그녀를 붙들어 다시 거실로 끌고 왔다. 차가운 잿빛 눈이 위험한 빛을 띠며 번득였다. [두번 다시 그런 말투는 용서 못해.] 샤리의 커다란 파란 눈이 감정에 북받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용서 못한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요? 절 때리실 거예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던은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아직 철부지야.] 그는 샤리를 끌어안자 그녀의 검은 머리에 얼굴을 묻고 부드럽게 말했다. [실컷 우는 게 좋아. 울고 나면 개운해질 테니까.] 샤리는 조던의 품 속에서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울고 싶지 않아요. 왜 울어야 돼요?] 그녀의 음성은 냉랭한 위엄에 넘쳐 있었다. 아기를 잃은 뒤 샤리는 눈물이 마를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나 지금은 둔한 상실감과 조던에 대한 미움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질지도 모른다고 의사 선생은 말했지만 내 인내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거야.] 조던은 살피듯 샤리를 쳐다보았다. [당신한테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아요.] 샤리는 조용히 응수했다. [비키세요. 지금부터 저녁 시간까지 제 방에서 쉬고 싶으니까요.] [우리의 방이야, 샤리.] 샤리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창백한 볼에 핏기가 올랐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 방은 계속 저 혼자만의 침실인 줄 알았는데요.] [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늘 밤부터 바꿀 셈이야. 당신은 이제..] [임신하고 있지 않으니까, 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죠? 좋도록 하세요. 하지만 제 환영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걸요.] [샤리...]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좋을 대로 하세요, 조던.] 이번에는 방해를 받지 않고 샤리는 침실로 피할 수 있었다. 침실 문을 닫자마자 무력감이 엄습해 와 샤리는 침대 위에 무너지듯 쓰러져 누웠다. 조던이 정말로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되도록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그가 금방 자기 몸을 요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지금은 그와 한 방에서 자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샤리는 이윽고 잠에 떨어졌고, 눈을 떠 보니 아버지의 도착 시간까지는 30분밖에 안 남았다.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 조던이 욕실에서 나타났다. 짙은 남빛타월의 가운만을 걸쳤을 뿐인 모습에 샤리는 일순 긴장했지만 표정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왜 깨우지 않았죠?] [당신이 쉬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야.] 조던은 젖은 머리를 타월로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좀더 일찍 일어날 셈이었어요. 제가 샤워를 하는 동안 당신이 아버지 상대를 해드려야겠어요.] 조던이 입은 가운의 깃이 벌어져 흰 살갗과 검은 비단과도 같은 가슴털이 드러나 있음을 샤리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조던은 타월을 침대 위에 내던지더니 성큼성큼 샤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장인의 상대를 하기 전에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있어, 자, 이리 와요, 샤리!]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은 안 돼요.] 샤리는 일어서자 옷장 속의 이브닝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입을 기회가 없었던 드레스였다. 지금의 날씬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니, 조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샤리!] 조던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에서 끌어당겼다. 그는 샤리의 목덜미에 속삭이듯 가벼운 키스를 했다. 샤리는 그의 키스에 오싹하여 그의 팔을 뿌리쳤다. [부탁이예요, 조던. 지금은 이런 짓을 하고 있을때가 아니예요.] [이런 짓? 난 다만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잠시 껴안아 주고 싶을 뿐이야.] 샤리는 모호하게 웃었다. [그럴 시간도 없는 것 같네요. 아버지는 곧 도착하신다는데 둘다 마중나갈 채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요.] [아버지 핑계는 대지 마. 그보다 내 키스가 싫은 거겠지.] 조던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흐려졌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안젤라 디바인과 밀회를 거듭한 사람이 뻔뻔스럽게 나에게 키스를 요구하다니! [그래요, 당신 키스가 싫어요.] 샤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짐작했던 대로군.] 그는 얼굴을 돌렸다. 방금 조던에게 안겼었지만 그녀는 그저 냉랭한 공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사랑,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졌던 그 기쁨은 모두 사라지고 미움만이 남았다. 샤리는 지금 두 사람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샤리는 몸서리를 치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조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을 본 뒤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서 맛보았던 고통과 환멸이 역력하게 살아났던 것이다. 샤리는 그의 소유물이 되고, 그 자신은 독신자처럼 행동한다- 이것이 조던과의 결혼생활이었다. 순진한 어린 아내.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천진난만하게 기뻐한 샤리를 그는 톡톡히 이용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성숙한 여성으로 자랐고, 조금은 영리해졌다. 냉정하고, 왠만한 일에도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 남편과 헤어진 이래 그와는 소식을 끊고 아버지 집에 살며 여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긴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이혼을 한 게 아니므로 전남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성을 따르고는 있지만 샤리는 지난 5년동안 쭉 자기는 자유로운 여자라고 믿어 왔다. 물론 조던도 독신자로 행세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아버지의 방문으로 샤리는 조던에게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5년전의 그날 밤, 데려가 달라는 샤리의 청을 아버지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조던이 쫓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기우로 끝났다. 절대로 샤리를 놓칠 수 없다는 조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월히 집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던은 그녀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다. 되도록 빨리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할 텐데..샤리는 프런트 데스크로 급히 갔다. 그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인 것이다. [로드 부인, 무슨 일이세요?] 살집이 좋은 몸매의 금발 미인인 프런트의 여자가 샤리를 향해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조던은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샤리는 문득 생각했다. 큰 키에 늘씬한 다리, 풍만한 몸매는 조던이 좋아하는 타입이다. 나와 결혼했을 때의 그는 일시적인 착란을 일으킨게 틀림없다. 그녀는 마른 몸매에다 키도 160센티 정도밖에 안 된 탓에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그녀를 작은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버지! 조던을 본 쇼크로 아버지 일을 깡그리 잊고 있었다. 샤리와 아버지는 4일 전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샤리는 무사했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다. 조던을 보았을 때, 샤리는 마침 병원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로드 씨를 찾고 계시다면 벌써 부인의 스위트룸에 들어가 계실 거예요.] 프런트의 여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샤리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디에 계신다고요?] [방금 부인의 스위트룸으로 올라가셨어요.]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샤리는 굳어진 표정으로 사의를 표하고 프런트 데스크를 뒤로 했다. 그렇다면 조던은 내가 이 호텔에 묵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남의 방에 들어가다니!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샤리는 며칠 전부터 묵고 있는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어디에도 조던의 기척은 없다. 방안은 조용할 뿐이다. 프런트의 여자가 착각한 것인가?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로드 부인, 필요한 것은 없으신가요?] 저 목소리는 호텔 지배인의 목소리다. 샤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배인은 샤리에게 언제나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그녀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없어요. 하지만 남편이..] [아, 네. 그럼 로드씨께서는 뭘 필요로 하시는지요?] 지배인은 열심히 물었다. [고맙네, 존. 필요한 건 다 있네.] 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났다. 샤리의 귀에 익은 음성. 샤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던은 침실 입구에 서 있었다. 흰 타월 가운을 걸치고 머리는 젖은 채였다. 샤워를 하고 난 뒤의 청결한 비누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조던..] 샤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로 고맙네, 존. 부탁할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하겠네.] 지배인을 물러가게 한 뒤 그는 잿빛 눈을 샤리에게 돌렸다. 회색 수트, 검은색 블라우스, 짧게 커트한 검은머리, 어리둥절해 하는 큰 눈, 창백한 얼굴... 조던의 눈이 가늘어지며 샤리를 자세히 훑었다. [센스가 그동안 형편없어졌군, 샤리! 그런 우중충한 옷은 당신한테 걸맞지 않아.] 2장. 조던의 말에 샤리는 발끈했다. [5년만에 만났는데 겨우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나요?] 침실로 들어가면서 조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느낀 대로 말했을 뿐이야.] 샤리는 그의 뒤를 쫓았다. [제가 어떠리라 상상하고 있었나요? 아버지가 중태에 빠져 입원하고 계신데 제가 어떻게 즐거운 낯으로 옷에 신경쓰겠어요?]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조던은 머리를 타월로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당신 자신이 추하다고 말한건 아니야. 당신 옷차림이 보기 흉해서 그랬을 뿐이지.] 샤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무슨 뜻이죠?] 그는 타월을 침대 위에 내던지며 샤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 나이 스물 셋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데 중년부인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잖아. 그런 상복과 같은 옷은 어디서 구했지?] [아버지 상태가 심상치 않은데 시뻘건 드레스라도 입으면 말인가요?] 그녀는 목이 메었다. [어때서 그렇지? 당신이 빨간 드레스를 입으면 장인께서도 기운이 나실 걸.] [아버진 제가 무슨 옷을 입든 보시지 못해요. 사고 이후 쭉 의식 불명이시니까요.] 조던은 짙은 갈색 바지와 크림빛의 셔츠를 입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 일은 나도 의사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 [어떻게? 병원에 가셨었나요?] 샤리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며 물었다. [갔었소.] 조던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샤리를 바라본다. [그래서요?] [당신이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은 나도 몰라. 하지만 상태는 차츰 좋아지고 있다더군.] [그러면 전 병원으로 돌아가겠어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호텔에 들렸던 거니까요.] [내가 생각한 대로군.] 조던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효녀라서 낮이나 밤이나 아버지 병상에 붙어 있었을 테니까 지친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더이상 이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샤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쳐 흐느꼈다. 조던은 샤리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이제 와서 울다니, 너무 늦었어.] 전류와 같은 흥분이 샤리의 몸을 꿰뚫었다.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그녀는 조던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와 헤어져 있던 지난 5년 동안 그의 일이 가끔 생각나긴 했지만, 그의 배신과 유산했던 일을 기억하고 항상 냉랭한 감정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샤리는 조던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휘저었다. [이 손을 놓으세요! 놓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샤리는 앙칼지게 말했다. [여자에게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래서 5년 전에 제가 집을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었나요?] 샤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바라던 일이니까.] [그래요! 그래서 전 집을 나온 일로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한번도요!] 샤리는 내뱉듯이 말했다.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그의 잿빛 눈이 번뜩였다.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날 그리워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건가?] 의식적으로 바랐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이 샤리는 그를 몹시 그리워했던 것이다. [아까 제가 우는 게 너무 늦었다니, 무슨 뜻이죠?] [우리 아기가 죽었을 때도 당신은 울지 않았잖아.] 벌겋게 달아오른 샬리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울지 않았다구요? 천만에요!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마를 정도였어요.] [그럼 언제 울기를 그만뒀지? 왜 나한테로 돌아오지 않았어.?] 조던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돌아가다니요? 당신한테로 말인가요?] 샤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웃었다. 조던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단신 남편이니까.] [어머, 그래요? 그럼 아까 당신과 호텔에 온 금발미인은 뭐라고 부를 셈이지요?] [자네트 아메리 말인가? 그녀는 내 비서야.] [아아 비서라구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병원에 가야 하니까요.] 샤리는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우연의 일치군. 나도 병원에 가려던 참이었어. 조던은 그녀를 위해 방문을 열어 주었다. [당신이? 왜요?] [나한테는 장인이니까 문병가는 건 당연한 예의가 아니겠어?] 호텔 현관에 대기시켜 놓았던 리무진에 올라타면서 샤리는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거북스런 예의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을 텐데요? 우린 실질적으로는 부부가 아니잖아요.] 조던은 크림빛의 좌석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댔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운 향기가 차 안에 자욱해진다. 서로 사랑을 나눈 뒤 침대에서 느긋하게 시가를 피우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그날 하루에 생겼던 일을 샤리에게 들려주면서... [하지만 당신 아버지인 데비드 데일은 내 친구이기도 해. 당신과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야.] [참 그랬었군요. 잊고 있어서 미안해요.] [당신은 너무 지쳐있어. 사고는 어쩌다 생긴 거지?] 샤리는 그 무서운 순간의 일이 생각나 침을 꿀꺽 삼켰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롤스로이스의 아버지가 앉아 있던 부분이 크게 우그러졌다...상대방 차의 젊은 두 사람은 무사했고 샤리도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흔히 있는 사고의 하나죠. 누구의 잘못도 아니예요.] [그런데 당신은? 다친 곳은 없나?] 조던은 샤리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사고가 난 것을 아셨죠?] [사업차 미국에 출장 갔었는데 친구가 알려 줬어.] [친구라니, 누구요?] [이안 스미드야.] [이안이라니요? 그 사람 아직도 당신 밑에서 일하고 있나요?] 샤리는 표정이 밝아졌다. 5년 전 이안은 조던의 조수로 샤리는 사람좋은 그에게 호감이 갔었다. [아냐, 이안은 독립했어.] [그래요?] 샤리는 흥미를 느꼈다. [응, 그 친구는 다소 계산적이야. 안소니 마일즈의 외동딸과 결혼했지.] 조던은 입을 일그러뜨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안소니 마일즈는 돈 많은 실업가였는데 일년 전에 심장 마비로 급사했다. [이안이 로라 마일즈와 결혼했군요?] 샤리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벌써 2, 3년 될 걸.] [이안이 계산적으로 결혼했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이안은 로라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 샤리는 이안을 두둔했다. [사랑하고 있었다고? 로라는 귀엽고 매력은 있지만 나라면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지는 않을 거야.] 멸시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로라는 당신 아내가 아니예요.] [고맙게도 말이야.] [두 사람 사이는 원만한가요?] [그런 것 같아.] 조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이네요.] [그러나 단언할 수는 없지. 우리도 행복한 커플이었지만 당신은 날 버렸잖아.] 조던의 눈이 광포한 빛을 띠고 있음을 깨닫고 샤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 대해서 새로운 미움이 솟구쳐 올랐다. [아무튼 좋아. 그런데 사고의 후유증은 없나?] 잠시 후 조던은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으며 물었다. [네, 전 괜찮아요.] 병원에 도착하자 조던은 운전 기사를 돌려보냈다.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아버지 병실로 향하면서 샤리는 자기 자신이 아직도 여리고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는 샤리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다루었던 것이다. 사고 이후 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었으므로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있었다.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지고 팔에는 점적주사를 위한 가느다란 튜브가 꽂혀 있었다. [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셨어요. 사고 직후에는 가슴에 저 커다란 모니터 장치에 연결한 전극이 부착되어 있었고 머리도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어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샤리는 떨면서 말했다. [의사의 얘기로는 충분히 회복되실 가망이 있다더군.] 조던은 나직한 음성으로 위로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샤리는 침대 곁의 의자에 앉으면서 아버지 손을 꼭 쥐었다. [언제나 이렇게 아버지 손을 잡고 말을 걸곤 해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도움이 될 거야. 어석 얘기를 해요. 난 의사를 만나고 올 테니까.] 혹시 나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버지가 의식을 되찾게 될 지도 모른다. 오늘은 아버지에게 알릴 뉴스가 있었다. 조던과 같은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아참! 그 일에 대해서 조던에게 따지는 걸 잊고 있었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 [고비는 넘기신 모양이야.] 조던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조금씩 차도는 있지만 2,3일 더 두고 봐야겠다더군.] 그도 의자에 걸터앉았다. 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런데 조던, 아까 제 방에서 무얼 하고 계셨어요?] [우리 방이야.] 샤리는 정색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방이라니요, 무슨 뜻이죠?] [그건 말이야. 당신이 내 방에서 묵고 있다는 뜻이야. 당신이 로드 부인으로서 예약한 방은 내가 일년기한으로 전세 낸 방이란 뜻이야.] 샤리는 숨을 삼켰다. [제가 당신 방에 들어간 거로군요.] [그렇지. 당신한텐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조던은 비웃듯이 입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호텔에 가서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고 하겠어요.] 조던의 잿빛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못하게 하겠어.] [전...] [생각해 봐, 샤리. 남편과 아내가 따로따로 방을 빌리다니, 그런 꼴사나운 짓이 어디 있어?] [싫어요!] [안 돼!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봐. 난 당신에게 부부 생활을 강요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건 우리 둘만의 문제야. 남한테까지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정말이세요?] 부부생활이라는 그의 말에 샤리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다. [믿어도 돼. 그보다 의사의 의견인데 말이야. 당신이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교대로 말을 걸기로 합시다.] [당신한테 그런 일을 부탁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바쁘실 테고 사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테니까요. 당신이 자진해서 청하는 이유는...] 갑자기 조던은 샤리의 턱을 꽉 쥐고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야 이유가 있지. 바로 당신이야!] 그는 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저 때문이라고요?] [거울로 자기 몰골을 잘 보란 말이야. 청바지와 셔츠라도 입으면 남잔지 여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위었어.] 샤리는 당황해서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제가 말랐다는 건 알고 있어요.] [말라도 보통 마른 줄 알아? 큰 눈만 뒤룩거리고 당신은 마치 해골 같아.] 샤리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요 며칠 동안 통 먹지를 못했어요.] [훨씬 전부터 당신은 이런 상태였나? 게다가 당신은 이렇게 금방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아니었어. 당신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던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야.] [미안해요.] 샤리는 또 코를 훌쩍였다. [미안해 할 건 없어. 당신이 날 버리고 나갔을 때의 얼음과 같은 차가움에 비하다면 우는 쪽이 훨씬 좋으니까.] 샤리는 아버지 손을 꼭 쥐었다. 조던의 곁을 떠난 뒤 샤리는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해 왔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조던의 여자 관계를 안 뒤에도 그녀는 아마 조던의 곁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결코 성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집을 나오겠다는 샤리의 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유도 묻지 않고. [전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는 아니예요. 다만 현실을 깨달았을 뿐이죠.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겠다- 그런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을 뿐이예요.] 조던은 숙연한 투로 말했다. [당신은...매력적이었어. 마치 봄의 산들바람처럼 신선했었지.] [제가 순진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샤리는 쌀쌀하게 응수했다. 그의 잿빛눈이 나무라듯 쏘아보았다. [당신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하지만 저 이외에도 많은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이를테면 자네트라든지..] [자네트는 내 비서야. 그 이상의 관계는 없어.] [비서 역의 정의 나름이겠죠.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비서로서의 일의 일부라 생각하면, 비즈니스라고 결론지어 버리면 일은 간단하지 않겠어요?] 샤리는 안젤라의 일ㅇ르 상기하면서 씁쓸히 말했다. [뭐가 간단하다는 말이야?] 조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제 말뜻을 몰라서 묻는 거예요?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몇 사람의...비서를 고용했지요?] [셋이야....] [셋 뿐? 거짓말 마세요.] [샤리!] 조던은 언성을 높였다. [지금 당신이 여기에 남겠어요, 아니면 제가 먼저 남을까요?] 샤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우리는 얘기중이잖아. 결말이 날 때까지 둘 다 여기 있는 거야.] [이미 몇 년 전에 결말은 났다고 생각해요. 자, 당신이 남겠어요, 아니면 제가?] [내가 남겠어.] 샤리는 일어섰다. [그럼 저는 나갔다 오겠어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몸을 굽혀 살며시 뺨에 키스를 했다. [샤리...] 나가려는 샤리를 조던이 문께에서 불러 세웠다. [왜요?] 샤리는 뒤돌아보았다. 얼마나 남자다운 매력에 넘쳐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그의 존재 자체가 자석처럼 여자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샤리는 숨을 죽였다. [뭐 잊은 거 없어?]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샤리는 손에 들고 있는 핸드백을 보았다. 그녀가 갖고 온 단 하나의 소지품이다. [아뇨, 아무것도 잊은게 없는데요.] [하지만 난 당신이 잊은 게 dT다고 생각하는데...] 조던은 결심했다는 듯 천천히 샤리 쪽으로 다가갔다. 샤리는 뒷걸음질 쳤다.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아득하고 빨려 들 듯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무...무슨 짓을 할 셈이죠?] [당신이 맞혀 봐.] 조던은 팔을 뻗쳐 샤리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안 돼요....] 그의 입술이 샤리의 입술을 덮쳤다. 주위가 빙빙 돌기 시작하며 조던만이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뼈가 으스러져라 샤리를 껴안고 사막의 나그네가 오아시스의 맑은 물을 들이켜듯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어느새 샤리는 발돋움하여 조던의 어깨에 매달려 미칠 듯한 흥분에 떨면서 그의 키스에 정신없이 응했다. 조던은 만족스럽게 신음했다. 샤리의 예민한 목을 입술이 쓸고 지나가며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서로를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샤리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자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숨가쁘게 헐떡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지고 뺨에는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다음에 키스 할 때엔 좀더 살이 쪄야겠어. 마치 조금만 더 세게 안으면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이야.] 넥타이를 바로 매면서 조던이 말했다. [그렇다면 절 안지 않으면 되잖아요!] 샤리는 딱 잘라 말하고 나서 아버지 병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어머, 로드 부인. 아버님께서는 차츰 좋아지고 계십니다.] 샤리의 아버지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간호사는 샤리와 복도에서 만나자 상냥하게 웃으며 알려 주었다. [고마워요.] 샤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남편과 교대하는 참이예요.] [그러세요? 로드 씨와 연락이 닿아 정말 다행이네요. 이제 로드씨께서 오셨으니까 한시름 놓으셨겠어요. 지금 아버님 병실에 계시죠?] [네!] 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라도 갖다 드려야겠네요.] [고마워요. 남편이 좋아할 거예요.] 샤리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었다. 그렇지, 조던은 무척 기뻘할 것이다. 이 젊은 간호사, 앤 페로즈는 금발인데다 제복으로 감싼 몸매 역시 날씬하다. 가는 곳마다 조던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과 만나다니! 간호사 페로즈는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그럼 곧 갖다 드리겠어요. 실례합니다, 로드 부인.] 페로즈는 조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으리라고 샤리는 추측했다. [그럼 나중에 또...] 샤리는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급히 병원을 뒤로 했다. 호텔 방에 도착하여 샤리는 조금전의 조던의 키스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놀랐다는 표현은 미온적이다. 유산한 후 그에게 얼씬도 못하게 했었는데, 아까는 그처럼 호락호락 그의 팔에 안기고 말았다. 5년이란 세월의 벽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조던과의 마지막 키스를 샤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의 노여움과 불만도. 그것은 샤리가 퇴원하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저녁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이 유산한 사실을 알고 얼마나 상심했던가...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탄식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기는 또 생깁니다.] 조던이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아뇨, 이제 아기는 생기지 않아요, 절대로.] 그때 샤리가 외쳤다. [1,2년 뒤에는 또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의사가 말했어.] [의사의 의견 따위는 관계없어요! 제가 아기를 갖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럴 리가? 당신은 아기를 갖고 싶어했잖아.] 조던은 초조함을 누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니까요.] 샤리는 내뱉듯이 대꾸했다. [샤리, 너는...] [이 일은 저와 아내가 해결하겠습니다.] 조던은 아버지의 말을 저지하고 나서 샤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와 침실을 같이 쓰는 게 싫다는 말이겠지?] [여보게, 내 생각으로는...] [제발 잠자코 계세요. 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으시다면 거실로 가셔서 기다려 주시죠.] 조던은 거칠게 샤리의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아버지가 마지못해 거실로 옮겨간 뒤 두 사람은 다시 말다툼을 시작했다. [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털어놔 봐.] [전 집을 나가겠어요.] 샤리는 나직하게 잘라 말했다. [당장 아버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겠어요.] [내가 그걸 허락할 줄 알아?] [당신은 절 붙잡아 둘 수 없을 걸요.] 샤리는 쌀쌀하게 말했다. [붙잡지 못한다고?] 조던은 의자를 차고 벌떡 일어서자 샤리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언제나 내 키스에는 약했어.] 조던은 거칠게 샤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는 샤리의 정열을 불러일으키려고 정신없이 키스를 계속했다. 그러나 샤리는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서있기만 했다. 그가 안젤라와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결국 그는 단념하고 샤리를 놓아주었다. [내게 키스하는 것조차 싫다 이거지, 좋아. 아버지를 따라가도록 해. 마음이 변해서 다시 돌아오고 싶거든 전화를 해. 당신은 내 것임엔 변함이 없으니까.] [전 누구의 것도 아니예요. 특히 당신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당신 따윈 정말 싫어요.] 샤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쏘아붙였다. [나도 지금처럼 당신이 싫은 적은 없어!] 조던은 식당에서 나오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방은 조용해졌다. 2,3일 마음을 가라앉혀 차분히 생각해 보라고 아버지는 권했으나 샤리는 지체하지 않고 짐을 꾸려 조던이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와 버린 것이다. 오후, 호텔 방에서 조던이 물었다. [왜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지?] 조던은 역시 그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며 묻고 있는 듯 했다. 샤리가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조던은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샤리는 한번도 하지 않았다. 햄프셔의 아버지 집에서 그를 잊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조던의 출현에 샤리의 마음은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튿날 오후 늦게 샤리는 병실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를 향해 조던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들려주면서,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눈꺼풀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며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아버지가 눈을 떴다. 샤리는 복받치는 기쁨에 떨면서 정신없이 버저를 눌러 의사를 불렀다. 샤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조심조심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샤리예요. 알아보시겠어요?]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으음, 너였구나. 지금 몇 시냐?] 아버지는 5일 동안 의식불명이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오후 네 시예요. 기분은 어떠세요?] [음, 머리가 좀 아프구나. 그리고 목도 마르고...]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좋은 징조입니다.] 아버지의 담당의사가 병실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선생.] 아버지는 의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내 사위는 어디 있소?] [조던의 여기 왔던 것을 기억하세요?] 샤리의 마음은 뛰었다. 아버지는 의아스러운 듯 샤리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기억에 없어. 하지만 네가 여기 있으니까 조던도 같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거야. 너희 휴가를 망치게 해서 미안하구나, 샤리.] 샤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버지....] [잠깐 나가 계세요. 로드 부인. 아버님을 진찰해야겠어요. 그 사이 로드씨께 전화로 연락하시는 게 어떨까요?] 의사가 말했다. [네, 그러죠.] 샤리는 아버지 손을 꽉 쥐었다. [아버지 곧 돌아오겠어요.] 조던은 의사가 아버지의 진찰을 끝내기도 전에 달려왔다. [차도가 좀 있었어?]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직은...그런데 머리가 좀 혼란해지신 것 같아요.] 샤리는 아버지의 병실에서 나오는 의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조던은 다가가 의사와 악수했다. [로드씨.] 의사인 마이클 존스는 고개를 끄덕이면 말했다. [두 분 다 같이 제방으로 가실까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아버지의 병세가 나쁜 것일까? 존스 의사의 진찰실로 들어서면서 샤리는 마음이 불편했다. 의사는 청진기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묘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은 결혼한 지 몇 년 되셨습니까?] 조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샤리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대답했다. [5년 됐습니다.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역시 제가 생각했던 대로군요.]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죠?] 샤리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생명에는 별 이상이 없습니다.] 의사는 샤리를 진정시키면서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아버님께서 '너희 휴가를 망치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고 사과하신 것을 기억하시죠?] [네!] 샤리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휴가란 두 분의 신혼여행이었던 것입니다. 두부 타박상으로 다소 기억을 상실하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조던이 말을 재촉했다. [테일 씨에겐 최근의 5년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머리 속에는 두 분이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것밖에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 3장. 놀란 나머지 샤리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억상실이 되어 버렸다. 전부는 아니지만 샤리와 조던이 별거생활을 해온 5년간의 기억을 잃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 그 사실을 알려드리겠어요. 조던과 제가..] 샤리는 깊이 생각지 않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건 좋지 않아.] 조던이 가로막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렇습니다, 로드 씨. 자기 생에의 5년 간이 공백이 됐다는 걸 알면 아버님은 크게 쇼크를 받게 됩니다. 심장 상태가.... [심장이라니요? 전 아무 말씀도 듣지 못했는데요.] [아버님은 이미 4년 전에 당신의 심장 이상을 알고 계셨지만, 아마 따님의 걱정을 끼치고 않으셨던 거겠지요.] 의사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변명했다. [기억을 잃으셨으니까 심장의 이상에 대해서도 잊으신 게 아닐까요?] 샤리는 지적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서 쇼크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건강관리를 해오셨습니다만, 앞으로는 주위에 계신 분들이 신경을 쓰셔야 할 겁니다.] [그런데 기억상실은 어느 정도 계속되나요? 아버지 기억은 되살아날 수 있을까요?] 의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글쎄요.. 수시간, 수일, 수주일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은 뭐라고 대답할 수 없군요.] [수주일? 그동안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장 안전한 방법은 5년 전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입니다. 아버님의 기억은 자연히 되살아 날 테니까 외부에서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요. 도리어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건 무리예요. 조던과 저는 저어...] [집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저희가 별거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조던이 자연스레 한마디 했다. 의사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일이 상당히 어렵게 됐군요.] [어렵게 되다니요?] 조던이 물었다. [데일씨는 얼마 후면 퇴원하실 수 있습니다만, 당분간 혼자 계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두 분 댁에 계시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혼하셨다면...] [이혼한 건 아닙니다. 별거하고 있을 뿐이죠.] 조던은 온화하게 의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이 안도 가능하겠군요.] 의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데일 씨를 위해 일시적이나마 화해하실 것을 전 권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둘이서 의논해 보지요. 결과는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던은 의사의 제안을 선뜻 받아 들였다. [당신과 함께 살 생각은 없어요.] 의사가 나가자 샤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게 말할 줄 짐작하고 있었어. 역시 당신은 당신 밖에 몰라.] [저는..] [당신은 차갑고 이기적인 여자야.] 조던은 언성을 높였다. [예전부터 그랬어. 한번 아버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란 말이야.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방금 돌아온 커플이 아니고, 실제로 5년 동안이나 별거중인 부부라는 사실을 당신 아버지가 아시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 차갑고 이기적인 여자라는 말에 샤리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개졌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어요.] 샤리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면서 말했다. 그와는 같이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의 키스에 그처럼 격정을 느꼈던 뒤인 만큼 샤리에게는 조던의 포옹에 대해서 저항할 수 없다는 자각이 있었다. 조던의 표정은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자는 건 아니야. 그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니까. 당신과의 결혼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 그러니까 신혼 시대를 재현할 마음은 추호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샤리, 당신 아버지에 대한 내 우정의 표시로써 우리가 금실 좋은 부부로 연극을 하는 데는 이의가 없어.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당신에게 달렸지만. 지금 당장은 결정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가 퇴원하시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자, 병실로 돌아가 상태를 봅시다.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저께 조던과 재회한 이래 마음이 몹시 착잡해 있는데 실제로 그와 같이 살고 그를 사랑하고 있는 연극을 해야 한다면.. 샤리는 자신이 없었다. 달리 해결의 길은 없을까? 조던, 그로서도 다시 남편 역을 한다는 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자네트나 다른 연인들에게 사정도 설명해야 할 테니까. [생각하는 건 뒤로 미루고 행복한 신부답게 웃어요.] 고민하고 있는 샤리를 향해 조던이 비웃듯이 명령했다. [당신의 순진한 신부였던 때의 일을 생각해 내려고 하고 있어요. 왜 그처럼 당신에게 매혹됐었는지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난 그 이유를 알아. 바로 섹스 때문이지, 샤리.] 샤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요, 조던. 왜 저와 결혼했는지 이유를 말해 주세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야 이유가 있지.] 조던은 내뱉듯이 말하고 진찰실을 나갔다. 샤리는 뒤쫒아가며 집요하게 물었다. [무엇이 이유였죠?] 갑자기 조던은 복도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나타내며 바라보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샤리, 그 질문은 나와 결혼하기 전이든지, 날 버리고 나갈 때 했어야 할 질문이야. 지금은 대답할 마음이 없어.] [그럼 왜 저와 이혼하지 않는 거죠?] [왜라니?] 그는 낮게 웃었다. [간단한 일이지. 당신이 대외적으로 방패막이가 되기 때문이야. 내 아내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는 많은데, 당신이 내 아내로서 존재하는 한 그녀들도 단념할 수 밖에 없잖겠어?] 조던은 이제 알겠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상냥하게 웃어요. 아버님 병실에 들어가니까.] 샤리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었고, 조던은 일부러 샤리의 손을 꼭 잡고 둘은 병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두 사람을 보자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바르바도스 섬에서의 신혼여행은 즐거웠겠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다. 샤리는 얼굴을 붉혔지만 그것은 연극이 아니었다. [네, 여간...] 조던은 샤리의 손을 놓으며 이번에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저희는 계속 별장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둘다 식사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놀리듯이 웃었다. [다른 일로 바빴어요.] 조던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겠군.] 아버지는 킥킥 웃으면서 샤리 쪽으로 손을 뻗쳤다. [샤리야!] [아버지, 몹시 걱정했었어요.] 샤리는 침대 곁에 앉아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울지 마라, 샤리야. 난 괜찮아. 그리고 네게는 이제 조던이 있지 않니.] 아버지는 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아버지의 말대로였다. 조던이 온 뒤부터 샤리는 불안하거나 막막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샤리, 이제 그만 갑시다. 아버지를 쉬시게 해야지.] 조던은 샤리를 일어나게 했다. [난 닷새 동안이나 깊이 잠들어 있었다던데?] [편안하게 주무신 건 아니죠. 그리고 몹시 쇠약해지셨어요. 두분은 내일 또 만나실 수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시게 하세요.] 아버지의 상태를 보러 온 페로즈 간호사가 참견했다. [간호사 말을 안 들을 수 없지.] 아버지는 조던에게 윙크했다. [예쁜 간호사가 와 주었으니까 너희는 이제 가도 돼.] 조던은 간호사가 침대 시트를 새 것으로 재빨리 가는 솜씨를 감탄하듯 바라보면서 맞장구를 쳤다. [부러운데요.] [어서 가요, 조던. 아버지 시중은 간호사에게 맡기고요.] 아버지는 소리 내어 웃었으나 웃음 때문에 머리가 울리는 지 얼굴을 찡그렸다. [샤리, 너는 질투가 심하니까 녹색 눈을 갖고 태어났어야 했어.] 조던은 샤리의 어깨를 안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샤리는 제가 바람을 안 피운다는 걸 믿고 있어요. 저는 아주 착실한 남편이니까요.] [암, 그래야지. 그리고 자네는 갓 결혼한 신랑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편히 누워 계셔야 해요. 그렇잖으면 두통이 심해져요.] 간호사가 타이르듯 말했다. 아버지는 또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걸.] 샤리는 아버지의 볼에 키스를 하고 작별을 고했다. 차에 올라타자 샤리는 신음하듯이 불평을 토했다. [이건 너무해요. 언제까지나 이 연극을 계속하고 있을지 전 자신이 없어요.] [당신의 연기는 그럴 듯 해. 페로즈 간호사에 대해 샘을 낸 연기에는 당신 아버지도 감쪽같이 속으신 모양이야. 아주 명연기였어.] 그것은 연극이 아니었다.... 5년전과 똑같은 상황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불쾌감과 노여움, 가슴을 태우는 질투가 그대로 되살아 난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그러나 샤리는 조던에 대한 자기 마음을 지금 굳이 분석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나요? 당신도 꽤 연극을 잘하시던데요.] 샤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고맙군.] 조던은 익살을 부렸다. [5년 간 떨어져 있었지만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 남편역에는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거야.] [극진한 사랑이라고요? 비싼 장난감처럼 다루는 게 극진한 사랑인가요?] [지난 일을 가지고 다투는 건 싫다고 말했잖아. 우리 둘의 사이는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가정하는 거야. 아버지 머리속에는 그 이후의 일은 없을 테니까.] 조던의 눈은 차갑게 빛났고 턱은 야무지게 굳어졌다. 샤리는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정말 회복하실 수 있을까요?] [당신도 의사의 말을 들었잖아. 기억 상실은 일시적인 현상이야.] [그럼 아버지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셈이세요?] [설명 따위는 안 해. 아내와 같이 사는 건 당연하니까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는 없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샤리는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응. 그런데 당신은 요즘 어때?]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뜻인가요?] 샤리는 얼굴을 붉혔다. [그래.] [아뇨. 남자친구는 없어요.] 사실 샤리는 한번도 남자친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조던 때문에 모든 남성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은 그렇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었다. 조던을 못 잊고 있다는 것이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호텔로 돌아왔을 때 자네트 아메리가 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거실 데스크 위에는 서류가 흩어져 있었고 자네트는 바쁘게 보고서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바로즈한테서 전화가 없었나?] 조던은 성급하게 물었다. [아직요.] 자네트는 타이프를 치다 말고 조던을 쳐다보았다. 푸르고 맑은 눈동자, 매끄러운 살결, 실크 수트를 걸친 우아한 자태- 아름답고 유능한 비서처럼 보였다. [꽤 꾸물거리는군. 그를 전화로 불러내 주지 않겠어. 지미는 오늘 밤 열 시를 넘기면 다른 매입자를 구하겠다고 했어.] [전 제 방으로 가겠어요.] 조던이 사업에 정신이 없음을 알고 샤리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던은 당황해서 샤리 쪽을 돌아다 보았다. [있다 저녁을 같이 할 수 있겠지?] [아뇨, 아쁘실 테니까 사양하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할 시간은 있어.] [저보다 미스 아메리하고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제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게 하겠어요.] 샤리의 음성에는 비아냥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조던은 성큼 샤리곁으로 다가오자 우악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아 복도로 끌어냈다. [당신은 나와 같이 식사를 해야 해! 그리고 자네트와 나 사이를 이상하게 보지 마. 그녀에겐 약혼자가 있어.] 샤리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놀랐다. [자네트에게 약혼자가 있나요?] [내 조수가 그녀의 약혼자야.] [바로즈 말인가요?] [그래.] 샤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짐짓 태연한 체 했다. 자네트 아메리와 페로즈 간호사에 대해서 정말로 질투하고 있었음을 그에게 눈치채인다면 부끄러운 나머지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즈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걸요. 자네트가 언짢아할지도 모르니까요.] [돈이 많고 적고는 상관없어.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갖는 건 용서 못해. 일에 방해가 되니까.] [당신한테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군요. 그렇게 부자면서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세요?] 샤리는 비웃듯이 말했다. [일을 하고 있으면 시름을 잊게 돼. 일이란 내 불만의 배출구야.]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샤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당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어떤 불만을 말하는 거예요?] [바로 이거야!] 조던은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면서 샤리에게 저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격렬하고 집요한 키스에 멍해진 샤리에게 그는 계속 키스를 퍼부었다. 샤리는 현기증을 느꼈다. 몸속의 피가 끓고 눈은 뜨겁게 타올랐지만, 샤리는 그 현기증을 그저 숨이 막히는 탓으로 돌렸다. [놓으세요!] 이윽고 샤리는 분연히 말했다. 계속해서 아찔한 감각을 들쑤시는 그와 자신에 대해서 샤리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두번 다시 이런 짓을 하면 가만 있지 않겠어요.] 조던은 낮게 웃었다. 얼굴에는 놀리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다. [하지만 난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은걸.] [그러나 전 싫어요.] 샤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더이상 자신을 속이지마. 당신은 예전부터 키스를 즐겼잖아.] [예전 일은 서로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샤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 대꾸했다. 방금 그에게 안겨 자신을 잊었던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키스는 예전 일이 아니야.] 조던은 쉰 목소리로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고 연습해 두는 게 좋지 않겠어? 아내에게 키스를 잘 하지 못하면 아버지께 체면이 안 선단 말이야. 또 당신은 나와 헤어진 후 키스하는 방법을 바꿨는지도 모르니까.] [전 절대로 그런 건...] 샤리는 말하다가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음을 보자 발끈했다. 도전하듯이 말투를 바꾸었다. [5년이란 결코 짧지 않아요. 그동안 데이트 한 번 없이 지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요?] [그러나 키스하는 사이가 될 만큼 오래 가지는 못했겠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연히 키스도 했어요.] 샤리는 머리끝까지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조던의 분노는 더욱 강했다. 코와 입 언저리에 깊은 주름이 잡히며 샤리에게 바싹 다가갔다. [몇 놈한테 키스를 받았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예요.] 샤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꾸했다. [아마, 당신의 여자들 수보다는 적을 거예요.] 조던의 손끝이 그녀의 팔을 욱죄었다. [그놈들과 잠자리도 같이 했나?] 심한 쇼크에 샤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다. 그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함부로..당신이야말로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겠어요?] 그는 강철처럼 차가운 잿빛 눈을 가늘게 뜨며 샤리를 노려보았다. [단언할 수 있다면 어쩔 테야?] 샤리는 코웃음 쳤다. [5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여자 없이는 단 5일 간도 참지 못하는 당신이 5년 동안이나?] [멋대로 생각해.] 그는 벌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혼사유를 찾는 거람녀 헛짚었어요, 조던.] [5년이나 별거하고 있으니까 성격의 불일치를 이유로 내세울수도 있어.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과 이혼할 생각은 없어.] [그러시겠죠. 별거중인 아내가 있다는 건 당신한테 편리할테니까요.] [맞았어. 당신은 왜 이혼하려고 하지? 결혼하고 싶은 남자라도 있는 거야?] 그는 이제 완전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샤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없어요.] [당신은 아기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어. 그래서..] [아기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고요? 누가 그래요?] 샤리는 정색을 하고 따졌다. [당신이 말했잖아.] 그는 샤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건 옛날 일이예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에 없어요.] [당신은 날 증오한다고 했어.] 그는 샤리가 나간 날 밤의 일을 상기하며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 아기가 그렇게 되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날 증오한다고 말하다니, 당신은 잔인한 여자야.] 유산한 이유, 조던과 안젤라의 대화 내용이 생각나자 샤리는 격하게 응수했다. [내 아기였어요. 당신은 아기에게 전혀 무관심했었으니까. 그 아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죠.] [당신은 몰라. 내 마음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던은 피곤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요, 이상하군요.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은 자기 아이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는 법이라고 전 믿고 있었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조나단이라고 이름 지을 셈이었죠. 그러나 유산을 하고 나자 전 신에게 감사했어요. 당신같은 비열한 남자의 이름을 따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조던은 어느 새 손을 들어 샤리의 뺨을 찰싹 소리나게 쳤다. 그녀의 머리가 기우뚱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힐난하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조던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너무 심한 말을 했기 때문이야, 샤리...] [다가오지 마세요.] 샤리는 그를 피하면서 외쳤다. [샤리...] [싫어요!] 샤리는 자기 침실로 뛰어들어가자 문을 잠그고 문에 기대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샤리, 미안해. 문을 열어!] 조던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문 저쪽에서 들려 왔다. [싫어요.] 샤리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뺨이 욱신욱신 아팠다. [좋아!]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식사는 여덟 시 반으로 예약해 두겠어. 늦지 않도록 해.] [당신과 함께 식사하지 않겠어요.] [끝내 고집을 부리면 후회하게 될 거야.] 그는 위협하듯이 말을 내뱉고는 물러갔다. 샤리는 비틀비틀 침대로 가서 천천히 엎드려 누었다. 조던에게 뺨을 맞았다. 아버지한테도 맞아 본 적이 없는 난데... 그러나 어쩌면 당연히 맞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그런 잔인한 말을 내뱉다니. 한 시간 가량 욕탕에 몸을 담근 뒤 샤리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랫입술이 약간 붉게 부어올라 있었지만 조던의 손가락 자국은 거의 없어져 있었다. 샤리는 화장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드레스는 파스텔 그린으로, 몸에 꼭 끼는 것을 골랐다. 눈동자의 깊은 보라빛과 검은 머리가 그린 색과 잘 조화되어 한층 더 아름다웠고 차갑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샤리는 여덟시 25분 정각에 거실로 들어갔다. 조던은 벌써부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일어섰다. 크림빛의 수트안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방금 감은 듯 머리가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가 샤리 쪽으로 다가옴에 따라 스킨 로션의 향내가 강하게 풍겼다. 조던의 어두운 눈동자가 샤리의 창백한 얼굴을 살피듯 쳐다보았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봤어. 별다른 이상없이 깊은 잠에 빠져 계신다는군.] [고마워요.] 샤리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샤리..] 조던은 그녀의 손을 쥐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샤리는 잡힌 손을 빼고 그의 곁에서 떨어져 섰다. [셰리를 마실 수 있을까요?] 샤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미안해. 순각적인 실수였어.] 조던은 셰리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조던의 손에서 잔을 받아들며 샤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예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어요.] 그때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저녁 식사가 온 모양이예요. 전 몹시 시장한데.. 제게는 뭘 주문해 주셨죠?] [오리 요리야.] [제가 좋아하는 거로군요.] [당신 식성이 변하지 않았다니 반가운 일이군.] 웨이터가 식사와 와인을 가져오는 동안 두 사람은 무난한 화제를 주고 받으며 차분히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웨이터가 왜건에 빈 그릇을 싣고 물러간 뒤, 샤리는 거실에서 두 사람의 커피를 따랐다. [문제가 좀 있어요, 조던.] 샤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뭐지?] 조던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있다. 경계가 풀린 듯 느긋한 그의 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샤리는 문득 연극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한 신혼부부인 듯 싶은 환상에 사로잡혓다. 그런 마음을 다잡으며 샤리는 얼른 말했다. [집 문제예요.] 조던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 아버지는 가정부를 고용하고 계시잖아?] [네, 하지만 아버지 집이 아니라 우리 집 얘기예요.] [집이 어떻길래?] [아버지는 우리가 신혼 때 살던 집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 호텔로 모시고 온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텐데. 어떡하면 좋지요? 아파트를 빌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조던은 번거롭다는 듯이 말했다. [난 그집을 그대로 놔두고 있어. 샤리.] 샤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집, 우리가 살던 그 집말인가요?]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마크로드 아줌마도 그대로 있나요?] [그래.] [그럼 왜 집을 두고 호텔에 묵고 있는 거죠?] 샤리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추억 때문이야.] [추억? 좋은 추억인가요, 아니면...?] 샤리는 날카롭게 질문했다. [물론 좋은 추억이지.]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조던은 일어나 문께로 향했다. 샤리는 애가 타서 외치고 싶을 정도로 조던의 대답이 궁금했다. 그러나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자네트임을 알자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자네트는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면서 한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방금 리처드 바로즈가 전화로 숫자를 알려왔기 때문에..] 조던은 그 쪽지를 받아들고 훑어보다가 희색이 만연해졌다. [지미에게 전화를 신청해놓고, 리처드에게는 이곳으로 빨리 오라고 해. 그와 구체적으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알겠어요.] 비서는 다이얼을 돌리면서 사과하는 듯한 시선을 샤리에게 보냈다. 샤리는 일어서며 조던을 향해 말했다. [편히 쉬세요, 조던.] [쉬라구?] 그는 쪽지위의 숫자에서 눈을 떼었다. [아아, 편히 쉬어요, 샤리.] 내가 거실에서 나오는 것을 조던은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모두 옛날 그대로다. 다만 예전의 나였다면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그의 아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내 역의 연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샤리에게는 차츰 현실과 연극이 분간할 수 없게 되어갔다. 4장. 두 사람은 날마다 아버지를 문병했다. 같이 갈 때도 있었고 따로따로 갈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기억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아 아직도 두 사람을 신혼부부로 보고 놀리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퇴원이 내일로 정해진 날,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도 할 겸 마크로드 부인을 만나기 위해 샤리는 5년 만에 옛집을 찾아갔다. 집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장식물 하나 달라진 게 없었고 오동통한 가정부는 여전히 바쁜 듯 일하고 있었다. [자, 차 준비가 됐어요.] 가정부는 쟁반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전혀 변하지 않으셨군요.] [많이 변했을 텐데요. 사정은 조던한테서 들었겠지요?] 샤리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네, 아씨. 아버님 일은 주인님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늘 쓰시던 방을 다시 꾸며 놓았는데, 빠진 게 없는지 아씨께서 나중에 살펴 보세요.] [수고하셨어요. 5년 전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라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예요.] [아버님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조던과 내가 결혼한 뒤부터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세요. 그래서 어렵게 됐어요.] 이튿날 샤리는 조던과 둘이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왔으나, 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까다롭게 되었다. 24시간 아버지와 한 지붕 밑에서 살아야 하므로 단 1분이라도 연기를 쉴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쇼크를 줘서는 안 된다고 존스 의사가 엄격하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거실 쇼파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조던에게 말했다. [전부터 이 집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 집을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바꾼 건 내 딸이야, 인정하겠지?] [물론입니다.] 조던은 머리를 끄덕여 보았다. [샤리가 없으면 전 한시도 못 사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아버지는 웃었다. [샤리, 왜 그러냐?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달링!] 샤리가 아버지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스커트 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므로 조던이 먼저 말을 걸었다. 달링이라는 호칭에 얼굴을 붉히면서 샤리는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뭐라 말씀하셨죠?] [당신 안색이 좋지 않다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셨어.]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흥분한 탓이예요. 아버지가 퇴원하셔서 기뻐요.] 샤리는 변명했다. [네 안색이 안 좋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야.] [특별한 이유라니요? 어마, 아니예요.] 샤리는 창백해졌다. [아니예요...] 가냘프게 되풀이하면서 부정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요? 결혼한 지 2,3주일 밖에 안 됐으니까 그렇겠지요.] 조던은 얼른 사이에 끼어 들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야.] [실례하겠어요. 전...가슴이 좀 답답해서요.] 샤리는 일어나 이층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아버지는 무의식중에 샤리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던 것이다. 아기 일에 대해서만은 연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샤리는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문이 열리더니 조던이 들어왔다. [방금 한 연기는 서툴렀어.] [서툴렀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기 일에 관한 건..싫어요.] [알고 있어.] 조던은 샤리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쥐었다. [당신 심정 충분히 알고 있어. 샤리.] 샤리는 긴장했다. 지금까지는 되도록 그를 피해 왔다. 그러나 둘이 한때 사랑을 나누었던 이 침실에서는 그를 피하는 것이 어려우리라 생각되었다. 샤리는 조던에게 잡힌 손을 살며시 뺐다. [알아주지도 않았으면서..이젠 때가 너무 늦어 버렸어요.] [아버지가 밑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지금은 말다툼하지 않겠어. 어서 가서 아버지 상대를 해드려. 점심 후에는 낮잠을 주무시니까 그땐 당신도 쉴 수 있겠지. 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면 물론 제가 아버지 곁에 있어야지요. 둘 중 어느 한쪽은 꼭 집에 있어야 좋잖겠어요?] [나도 집에 있겠어. 자네트와 서재에서 일을 할 작정이야.] 질투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전 외출하겠어요.] [샤리!] 문밖으로 나가려는 샤리를 조던이 황급히 불러 세웠다. [아버님 머리속에서의 우린 신혼부부야.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을까?] 샤리의 보라빛 눈동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조던의 얼굴을 응시했다. [둘이서 다시 한 번 시작하자는 말씀인가요?] [그래.] 조던은 쉰 목소리로 인정했다. 샤리는 혐오감을 나타내며 뒷걸음질 쳤다. [당신에게 아내는 필요 없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해, 샤리. 당신만이...] [너무 늦게 깨달으신 것 같군요.] 샤리는 차갑게 대답했다. [전 지금부터 밑에 내려가 아버지 상대를 하겠어요. 당신도 가시겠어요?] [곧 가지.] 조던이 외면하면서 말했다. [당신 먼저 내려가.] [좋아요.] 샤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조던에 대한 미움이 점점 느슨해지며 그의 청을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자신을 자꾸 채찍질 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전보다 야위고 핼쓱해서인지 나이보다 늙게 보였다. 샤리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버지는 샤리를 보자 일어나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샤리야, 내가 나빴다. 조던에게 들었는데, 유산 때문에 넌 신경과민이 돼 있다면서? 그가 빨리 아이를 낳아달라고 부탁해서 말이야. 난 네 의견에 찬성이야. 열 여덟에 아기 엄마가 된다는 건 너무 일러.] 조던은 조금 전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 침실로 뛰어들어간 일에 대해서 이 같은 변명을 해 준 것이다. 샤리는 화가 치밀었다. 샤리는 흥분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점심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자기 방으로 물러가자마자 샤리는 외출할 채비를 했다. [어딜 가는거야?] 그녀가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조던이 쫓아왔다. [런던이요. 외출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샤리는 운전석에 앉아 시트 벨트를 채우면서 대답했다. 조던은 차의 문을 연 채 손을 놓지 않았다. [어딜 가는 거지? 간단히 런던이라고 말하지 말고. 가는 장소를 정확히 말하기 전에는 보낼 수 없어.] 샤리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조던을 쳐다보았다. [매기를 만나러 가요. 매기에 대해선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 말고. 나와 매기는 옛날부터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이니까.] [참 그랬었군요.] 샤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일부러 매기를 찾아가는 건가? 둘이서 내 험담을 하며 즐길 테지. 마지막으로 매기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날 염치없는 놈이라고 욕을 퍼부어댔었지.] 샤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언제 있었던 일이죠?] [당신이 집을 나간 바로 뒤야. 매기는 당신이 날 버린 줄은 몰랐던 거야. 당신들 두 사람은 날 화제로 삼아 유쾌한 오후를 보낼 수 있겠군.] 샤리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오겠어요. 문에서 손 좀 떼세요.] 조던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눈에 익은 빨간 미니스커트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 애인이 오시네요.] 샤리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알려 주었다. 조던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군.] 샤리는 문을 꽝 닫자 액셀을 세게 밟았다. 친한 듯이 손을 흔드는 자네트에게 냉랭한 시선을 보내고 나서 샤리는 큰 길로 차를 몰았다. 그렇다면 매기는 내가 떠난 뒤에 그를 만났다는 말인가? 메기가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매기는 샤리의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미국의 대목장주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를 가진 매기는 부친의 목장 후계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만, 목장 일에 염증을 느껴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것이다. 많은 남자친구가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있다. 조던은 매기가 지나치게 제멋대로 군다고 해서 싫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샤리도 자연히 그녀와의 교제를 끊고 있었으며 어쩌다 일이 있으면 레스토랑이나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가 만났다. 매기도 조던을 싫어했으므로 샤리에게는 그것이 늘 두통거리였다. 샤리가 전화를 걸자 매기는 오후에 차라도 같이 마시자면서 프리로 하고 있는 의상 디자인 일에서 잠시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매기는 활달한 모습으로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나타났다. 샤리의 마음은 반가움에 설레였다. 뒤로 길게 늘어뜨린 다갈색 머리, 검은 속눈썹에 짙은 갈색 눈동자, 주근깨투성인 코, 언제나 미소 짓고 있는 도톰한 입술- 매기는 자연스런 매력에 넘쳐 있었다. [샤리!] 매기는 샤리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한 번 세게 껴안고는 샤리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말했다. [너 퍽 건강해진 것 같구나.] 샤리도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너도야. 너의 아버지 일은 들었어.] 매기는 갑자기 침울해진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미국에서 돌아왔어. 그래서 너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누구도 너 있는 곳을 안 가르쳐 주지 뭐니, 오늘 네가 전화를 걸지 않았으면 경찰서로 갈 참이었어.]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밀로 하고 있는데엔 이유가 있어.] 매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예기 해 봐! 재미있을 것 같다.] 샤리는 띄엄띄엄 얘기하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둑이 무너지듯 그동안의 경위를 죄다 애기했다. [그래서 말이야.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단다.] 샤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동안 너는 조던과 같이 살아야겠구나?] 매기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샤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인 아직도 내 남편이야, 매기.] [그럼 너와 조던은 다시..?] [천만에. 내가 말한 뜻은 나와 조던이 같이 사는 건 법적으로 보아 문제가 없다는 것뿐이야.] 샤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넌 여전히 순진하구나, 샤리. 나였다면 그와 즐길 수 있는 데까지 즐기고 나중에 슬퍼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처음부터 결혼따윈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매기는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며 말했다. [그땐 나중에 이렇게 될 줄 몰랐었지.] 샌드위치에는 손도 안 대고 홍차만 홀짝홀짝 마시면서 샤리는 말했다. [조던은 '그로부터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타입은 아니야. 잠깐동안의 정사만을 즐기고는 안녕이야.] 샤리는 울컥했다. [내 남편을 싫어하면서도 그에 대해선 잘도 알고 있구나 넌.] [아차! 내가 잠자고 있는 사자를 깨워 버렸나봐.] [무슨 뜻이야, 그 말은?] [학창 시절, 널 화나게 하기란 정말 힘드었지. 하지만 일단 화를 내면 무서웠어. 지금처럼 말이야.] 매기는 포크로 샌드위치를 찍으면서 말해다. 샤리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옛날부터 매기는 다정하게 샤리의 얘기를 들어주곤 했었는데..매기도 터놓고 조던을 싫어했으며, 조던도 질세라 매기에 대해서는 무례했다. [미안해. 피로 때문에 신경 과민이 된 모양이야.] [괜찮아.] 매기는 쾌활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던은 그렇게..깨끗한 생활로 만족하고 있니?] 매기의 노골적인 질문에 샤리는 얼굴을 붉혔다. [오히려 조던 쪽에서 아버지를 위해 연극을 하자고 주장했어.] [널 침대로 유혹한 적도 없었고?] [매기!] 샤리의 얼굴은 불덩이처럼 빨개졌다. [좀 지나쳤나..하지만 어땠어? 대답해 봐.] [없었어.] 샤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매기는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좀 초조해진 게 아니니?] [별소릴 다하네. 단지 너의 그런 질문이 싫을 뿐이야.] 샤리는 날카롭게 부정했다. [알았다, 알았어.] 매기는 이번에는 크림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난 오후에 차를 마시는 영국 사람들의 습관이 아주 좋아. 맛있는 간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뚱뚱해지면 어쩌려구.] [염려 마. 학교 다닐 땐 올리브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손님들 중에는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면 나와 똑같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간혹 있단다. 돼지처럼 뚱뚱한 주제에 말이야.] 샤리가 웃기 시작한 것을 보고 매기는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자만심이 아니야. 내가 디자인한 옷이 내게 여간 잘 어울리지 않아. 샤리, 웃지마.] [알고 있어. 자만심이 아니라는 걸.] 그러면서도 샤리는 킬킬 웃었다. [역시 얼마간은 자만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갖고 싶은 건 어떻게든 손에 넣는다- 이게 내 생활 철학이야. 쓰라린 체험에서 얻은 교훈이지. 내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생활비 주는 걸 중지했어. 그래서 아버지 도움 없이 살아가려고 결심했던 거야. 쉽지는 않았지. 이제야 겨우 독립한 셈이야. 아버지도 단념하고 날 위해 부티크를 차려 줄 모양이야.] [어마, 그거 참 잘 됐다.] [단, 미국에서라는 조건부야.] 매기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미국은 싫으니?] [난 영국이 좋아. 특히 지금은 말이야. 아주 근사한 남자친구가 생겼어. 그이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참, 내 정신 좀 봐. 빨리 돌아가야겠어. 그이를 위해 저녁을 만들어 줘야 하거든.] 매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샤리, 나중에 전화할게.] 매기는 흡사 태풍 같았다. 정열적이고 , 무슨 일에든 온 몸으로 부딪쳐 나갔다.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으므로 샤리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아버지는 저녁 때까지 주무실 것이다. 조던과 단 둘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여자가 바닥이 미끄러운지 넘어질 뻔했다. 샤리는 재빨리 일어나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샤리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네, 괜찮아요.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예요.] 대답하는 음성은 매우 침착했다. [여기 좀 앉으시죠.] 샤리는 의자를 끌어 권했다. [차라도? 어지럼증이 한결 나아지실 거예요.] [친절하시게도, 정말 고맙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중인데 오지 않는구뇨.]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여간 창백하지 않다. 금발은 짧게 커트했고, 파란 눈이 웃고 있다. 샤리는 이 젊은 여자가 한눈에 좋아졌다. [임신하셨군요, 힘드시죠?] 그 여자는 귀엽게 얼굴을 붉히면서 샤리의 결혼 반지를 보고 말했다. [자녀분은?] [없어요. 유산이 돼서..] [어마, 죄송해요. 저도 유산할 뻔한 적이 있었어요. 참, 제 이름은 로라라고 합니다.] 푸른 눈이 동정하듯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샤리예요.] [친구가 돼서 정말 기뻐요. 남편을 기다리느라 지루했는데 말을 걸어줘서 고마웠어요. 남편은 일 때문에 항상 바쁘답니다.] [그 심정 이해해요.] 샤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댁의 주인께서도 역시 바쁘신 분인가요?] [일에 미친 사람이죠. 그런데 해산 예정일은 언제지요?] [5주일쯤 남았어요. 지금의 제 모습 보기 흉하죠?] 로라는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이제 곧 끝나게 돼요.] [그 뒤는 더럽혀진 기저귀나 울어대는 아기와 씨름하는 나날이 되겠죠.] 로라는 웃었다. [남편은 아빠가 되는 게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인 것처럼 흥분하고 있답니다.] [부럽군요...] 샤리는 목이 메었다. 조던도 그랬으면... 로라는 벌떡 일어섰다. [남편이 왔어요.] 그녀는 남편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달링!] [늦어서 미안해, 여보.] 로라의 남편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이 무거운 아내를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샤리에게는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로라의 남편이 누구인지 샤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안 스미드!] 그녀는 일어서서 소리쳤다. [샤리..?] 이안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샤리를 바라보다가 자신없다는 듯이 물었다. [샤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예요?] [정말 샤리야?] 이안은 샤리를 끌어안았다. 짙은 금발, 맑고 푸른 눈동자, 늘씬한 키, 그는 옛날 그대로였다.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되다니 감격적인걸.]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이안.] [두 분은 전부터 아시는 사이였군요.] 남편과 샤리를 바라보면서 로라가 끼어들었다. 이안은 아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라운지 쪽으로 갑시다. 여기서는 남의 눈을 끄니까. 샤리, 당신을 만나다니 정말 뜻밖이야.] [여보, 절 이분에게 소개해 주지 않겠어요?] 라운지의 의자에 앉으면서 로라는 재촉하듯이 말했다. [물론 소개하지. 로라, 이분은 샤리 로드. 샤리, 이 사람은 아내인 로라야.] 로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간단한 소개로군요. 그런데..로드 부인이라면 혹시?] [조던의 부인이셔.] [어머 그러세요?] 로라는 얼굴을 붉혔다. [조던씨는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예에..] 샤리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됐네요. 조던과의 약속 시간이 다 돼서 전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다시 같이 살기로 했어요? 아 참, 실례.. 주제넘은 말을 해서. 아버님 상태는 어때요?] [차츰 좋아지고 있어요.] [벌써 퇴원하셨나요?] [네, 실은 오늘 퇴원했어요. 아버지는 조던의 집에서 정양하고 계세요.] [오늘 밤 시간이 있으세요? 당신과 로드 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군요.] 로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 괜히 폐가 될 것 같아요.] 샤리는 점잖게 로라의 초대를 사양했다. [친구들을 소개하는 게 이 사람의 취미지요. 이렇게 큰 배를 하고서..] 이안이 놀렸다. 그래요? 그러면 조던과 상의해 보겠어요.] 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로드씨한테 전화를 걸죠.] 이안이 즉각 자청했다. 샤리는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자 주차장을 향해 급히 걸어갔다. 스미드 부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던의 아내로서 사교의 자리에 나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연극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샤리가 집에 돌아와 보니 조던은 초조한 모습으로 거실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지? 매기한테 전화를 했더니, 당신과는 벌써 헤어졌다고 하더군.] 샤리는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당신 매기한테 전화를 했나요?] [그래!] 그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나요?] [아니.] [그럼 왜 전화를 하셨어요? 제 소행을 조사하고 있었나요?] [못난 소리 하지마. 당신이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길래..] [걱정이 돼서 전화하셨단 말씀이시군요?] 샤리는 코웃음 쳤다. [그래, 걱정이 돼서 전화해봤어. 당신은 아주 난폭하게 운전을 하며 나갔으니까.] [왜 늦어졌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알고 싶어.] 조던은 완강하게 말했다. 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옛친구를 만났어요.] 조던은 긴장된 표정으로 수상하다는 듯이 샤리를 노려보았다. [옛친구?] 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친구예요, 누군지 알고 싶죠? 혹시 여자 친구가 아닐까 걱정이 돼요?] [샤리!] [이안과 그의 귀여운 부인을 만났어요.] 샤리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이안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면서 당신한테 전화하겠대요. 초대에 응하든지 거절하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은 어때? 가볼 텐가?] [로라에게 호감이 가요, 하지만...] [그럼 가기로 합시다. 내주중에...] [좋아요. 그런데 이제 곧 그들의 아기가 태어나요.] 샤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래..] 그는 입을 꽉 깨물었다.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낮잠을 주무신 뒤라 기운이 있어 보이는군요.] 샤리는 아버지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응, 기분이 좋아졌어. 그리고 조던에게 너무 걱정시키지 마라. 여러 가지로 신경쓸 게 많을 텐데..] 아버지는 샤리를 나무랐다. [조던에게는 아주 좋은 방법으로 사과했어요.] 샤리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럼 난 노크를 하고 이 방에 들어오는 건데 그랬구나.] 아버지도 웃었다. [참 아버지도...] 샤리는 아버지에게 가볍게 키스하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저녁 식사 동안 조던은 완벽한 남편 역을 하며 샤리에게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아버지가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샤리는 알아챘다. 적어도 아버지만은 행복하리라. 저녁식사가 끝난 뒤 셋이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여느때처럼 조던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신혼 때, 그는 카드 놀이를 가르쳐주고 그녀가 질 때마다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겼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져서 알몸이 되곤 했다. [얘야,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샤리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멋적어져서 흘끗 조던쪽을 살펴보니, 그는 샤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헤아린 듯 싶었다. 그의 입술이 비웃듯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샤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아버지. 좀 피곤한 것 같네요.] [저도 그런데요. 오늘은 이만 끝내기로 하지요.] 조던은 카드를 모아 들었다. 침대 커버는 단정하게 덮혀 있었고, 레이스의 네글리제가 침대 위에 놓여있는 것도 옛날 그대로였다. 샤리는 샤워를 한 뒤 타월을 몸에 둘렀을 뿐인 모습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침실에는 조던이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웃옷을 벗어 버렸고,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뭘 하고 계세요?] 샤리는 헐떡이면서 힐문했다. 그는 샤리를 안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보면 몰라?] 샤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조각상처럼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방에서 자는 건 용서 못해요.] [흥, 마음대로 해.] 조던은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서서 도전하듯이 팔짱을 끼었다. 5장.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샤리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 집에서 같이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침실까지 타협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전에 쓰던 방이 있잖아요.] [그 방엔 당신 아버지가 계시잖아.] [다른 방이 또 있잖아요!] 샤리는 몸에 타월을 단단히 감으면서 쏘아붙였다. [난 이방에서 나가지 않겠어.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야.] [아버지를 위해서라고요? 당신이 어느 방에서 자는지 아버지가 아실 턱이 없잖아요?] [그러나 밤중에 갑자기 뭔가 필요하셔서 우릴 깨울지도 모를 일이고, 새벽에 일어나서 우리 침실의 문을 노크하실지도 모르니까 어쩔 수 없어.] [그런 일을 하실 리 없어요. 당신이 안 나가시겠다면 제가 다른 방에서 자겠어요.] 샤리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샤리!] 조던은 샤리의 팔을 잡아 끌었다. [더이상 비정상적인 상태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샤리는 목에 힘을 주고 조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몰라서 물어?] [모른다니까요.] 샤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더욱 힘을 주어 잡았다. [아파요!]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생활할 순 없어. 5년이나 자신을 억제해 왔어. 화해하지 않겠나?] [싫어요.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해결될 문제가 아니예요. 그리고 몇 년이나 당신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샤리는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도전하듯이 조던을 응시했다. 조던은 치미는 분노를 참으려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목의 혈관이 심하게 맥박쳤다. [그럼 생각나게 해주지.] [싫어요!] 샤리는 접근해 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 얼굴을 도리질했다. [쓸데없는 고집은 이제 그만 버려.] 조던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살갗을 간질이는 듯한 부드러운 감각적인 키스가 목을 눌러왔다. 샤리는 이 감각적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고 애쓰면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차츰 부풀어오르는 감각으로 몽롱해지면서 그녀는 양손으로 조던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애태우는 듯한 혀의 움직임으로 가슴이 차츰 커지며 젖꼭지가 단단해졌다. 은밀한 욕구로 인해 샤리의 호흡은 차츰 가빠지며 빨라졌다. 그의 입 안에서 그녀의 유두가 빠져나오는 순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서 강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렬한 욕구로 헐떡이던 그의 손이 가볍게 누르고 있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자신의 남성을 눌러왔다. 가능하면 당장이라도 그녀안으로 자신을 집어넣고 폭발하고 싶었다. 허겁지겁 그녀의 몸에 감겨있던 타올을 찢어버릴 듯이 아래로 떨어뜨리고 자신의 옷들을 벗어 던졌다. [아아, 조던!] 다리 깊숙한 곳에서 터질 듯 밀려오는 갈망으로 인해 그녀는 조던에게 자신을 밀착시키며 그의 억센 넓적다리에 허리를 밀착시키며 몸을 움직였다. 결국 참지 못한 조던이 그녀의 어깨를 침대에 바짝 붙인 채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그녀의 촉촉한 몸 속으로 자신의 폭발할 듯한 남성을 빨려들 듯이 끼워넣었다.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자제심이 흩어지면서 빠르게 그녀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 듯이 녹아들었다. 조던은 울부짖듯 숨을 토해내며 그녀를 빠르게 리드해 나갔다. 촉촉하고 매끄러운 그녀의 자궁 속에서 빠르게 소용돌이 치며 그녀 안으로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갔다 .마침내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를 삼키는 샤리의 입술을 그의 입술이 녹이며 두 사람은 땀범벅이 된 채 서로에게 더욱 단단히 매달려 폭발하듯이 하나로 녹아들며 거센 진동을 잠재웠다. 잠시후 조던은 감각적인 기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강제적인 행위에 대한 쓰디쓴 후회를 하고 있었다. 샤리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같은 상황에서도 욕망에 밀려 버릴 자신의 나약함이 더욱더 저주스러웠다. 조던은 타월 가운을 걸쳐 입자 떨리는 손으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괜찮나, 샤리? 언제나 당신한텐 생각지도 않던 행동을 하게 되는군.] [생각지도 않던 우발적인 행동이란 말이지요? 그럼, 간단하네요. 아무일도 없었던 걸로 하면 되잫아요.] 샤리는 시트로 알몸을 가리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조던은 긴 손가락 새에 끼운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 깊숙이 빨아들였다. [결국 없었던 일처럼 잊으란 말이군?] 샤리는 내심 동요를 감추면서 짐짓 쌀쌀맞게 어깨를 으쓱하며 조던을 향해 마음껏 비꼬았다. [잊을 수야 없잖겠어요? 5년만에 재결합한 정사 상대를 쉽게 잊기란 무리지요. 그나저나 좀 쉬고 싶은데 괜찬겠죠? 피곤해요.] 조던은 피우던 시가를 난폭하게 비벼 끄고는 샤리의 어깨를 움켜잡고 뒤흔들었다. [지금 쉬게 할 수는 없어.] [그럼 어쩌란 말예요?] [꼭 알고 싶나?]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가운을 벗는 그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고 세차지기 시작했다. 샤리도 또한 욕망이 솟구쳐 무의식중에 숨을 삼키고 있었다. [이번 정사는 둘이서 합의한 것임을 명심해. 결코 생각지도 않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야. 정사 상대로서 쉽게 잊혀질 수도 없게 해주겠어. 당신은 내가 원할 때까진 항상 내 상대로 있어야 할 거야.] 조던은 주저하지 않고 샤리의 채 마르지 않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동굴 속으로 격렬하게 밀고 들어왔다. 허리운동을 하지 않은 채로 샤리를 가득 채운 채 그녀의 전부를빨아들일 듯이 격렬히 키스했다. 그녀의 벌거벗은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스칠 듯이 닿자 격렬한 욕망이 몸을 꿰뚫듯이 지나며 터질 듯이 그녀를 채운 그의 남성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운동을 했다. 하지만 조던은 샤리의 무조건적인 항복과 복종을 원했다. 거의 이를 악물다시피 목구멍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소리를 그는 깨닫지 못하고 이썽T다. 그는 손바닥 가득 그녀의 풍요로운 가슴을 움켜쥐며 손가락 끝으로는 단단해진 유두를 애무했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은밀한 허벅지를 쓰다듬자 샤리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게 숨이 막힐 듯한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조던.....제발...] 그녀의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엉덩이를 들어 그에게로 더욱 밀착시켜 갔다. 자궁을 통해 녹아드는 그의 남성이 마침내 통제할 수 없는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 안으로 매번 더욱 깊숙이 파고들면서 잣니을 그녀에게 맞춰갔다. 샤리의 커진 두 눈은 쾌감에 찬 조던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감겼다. 조던의 공격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착각 속에서 쉴새없이 밀려오는 열기를 샤리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야수의 울음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며 은밀하게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열기에 압도되듯 두 사람은 공중에서 산산이 폭발해서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듯 잠속으로 빨려 들었다. 이튿날 아침, 샤리는 조던이 깨기 전에 눈을 떴다.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젯밤 일은 일절 생각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조던의 아내이다. 비록 별거하고는 있지만. 육체적으로 즐긴다고 해서 하등 죄 될 것은 없는 것이다.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아씨?] 거실에서 샤리가 핸드백을 찾고 있자니까 가정부가 말을 걸었다. 샤리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생각없으니까 그이한테만 커피를 갖다 드리세요. 난 잠시 나갔다 오겠어요.] 샤리는 핸드백에서 지갑과 자동차 키를 꺼냈다. 꼭 외출해야 할 목적이나 가야 할 곳은 없었다. 다만 조던과 얼굴을 대하기 전에 드라이브라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따름이었다. 겁쟁이 같은 짓이지만 지금은 혼자서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었다. 어젯밤 5년 동안 써 온 차가운 가면이 조던의 품속에서 벗겨지면서 여자로서의 강한 욕망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조던과 얼굴을 대하기 전에 냉정을 되찾고 싶었다. 조던을 만나지 않았던 5년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조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리는 이제 이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5년전의 일은 단지 자기 감정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을 뿐이다. 다시 조던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간직할 수 있을까? 조던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채는 굴욕만큼은 맛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상대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하는 건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드라이브 한 덕으로 샤리의 머리는 개운해졌고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조던의 즉흥적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숨겨야 한다. 5년전 그는 샤리의 풋내나는 직선적인 사라에 싫증이 나, 결혼 후 몇 주일도 안 돼서 다른 여자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의 그 고통을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고 성숙한 여자를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의 마음을 붙들어 놓고 영구히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샤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일어나 거실에 있었다. [조던은 방금 나갔단다.] 아버지는 샤리의 볼에 키스하면서 일러 주었다. 샤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볼일 보러 나간 모양이죠. 오늘은 뭘 할까요?]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게 좋으 생각은 없니?] [바닷가로 드라이브 하는 게 어떻겠어요? 모래사장에 누울 수도 있고 헤엄도 칠 수 있잖아요.] 그들이 런던 근교의 휴양지 브라이튼에 당도한 것은 정오경이었다. 물이 차서 도저히 오래는 물속에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으로 나와 타월을 펴고 몸을 말렸다. [점심 드시겠어요?] 샤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물었다. [그러지. 그런데 어디서 식사를 하지?] [여기서요.] 샤리는 생긋 웃었다. [타월을 깔아 놓으세요. 전 생선 고로케를 사가지고 오겠어요.] [바르바도스 섬에서는 좀 나은 식사를 했을 테지?] 아버지는 웃었다. 바르바도스 섬에서의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아버지가 믿고 있음을 생각하고 샤리는 얼굴을 붉혔다. [좀더 고급스러웠지만 여기서 먹는 것도 즐거워요.] 샤리는 비키니 위에 진즈를 입으며 말했다. 샤리가 사가지고 온 생선 고로케를 아버지는 맛있게 들었다. 샤리는 유쾌했다. 고급 레스토랑의 식사에 익숙해 있는 아버지인데... [디저트는?] 기름이 밴 신문지를 치우면서 아버지 역시 유쾌한 듯 농담을 하신다. [없어요. 하지만 그대신 이걸 사왔어요.] 샤리는 백에서 캔 코카콜라를 꺼내어 아버지에게 건네주고 자기는 타월 위에 길게 누웠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그녀는 이내 잠이 들었다. [고단했던 모양이야. 갓난아이처러 새근거리며 잘도 자더구나.] 샤리가 눈을뜨자 아버지는 놀리듯이 말했다. [조던이 널 잠도 제대로 못 자게 괴롭히는 건 아니냐?] [참 아버지도...우리 솜사탕 먹어요.] 두 사람은 손에 하나씩 솜사탕을 들고 먹었다. 입 언저리에 온통 솜사탕이 묻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샤리는 깔깔 웃었다. [모두 이 아버지를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걸 봤지? 네 늙은 남자친구로 여기는 모양이야.] 아버지는 먹다 만 솜사탕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했다. 샤리도 주위사람들의 묘한 시선을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몰랐던 것이다. [그럼 우리 한번 멋지게 연극을 해볼까요?] 샤리는 발돋움하여 아버지에게 키스했다. [딸같은 여자를 연인을로 데리고 다니는 주책없는 늙은이로 오인받는 기분이 어떠세요?] [아주 좋아.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는걸.] 아버지는 웃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진지하게 말했다. [네 결혼생활이 행복한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샤리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쾌활하게 말했다.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어. 네게 대한 조던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 아버지한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던가요?] 샤리는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조던이 네게 청혼했을 때, 그와 얘기를 나누었지. 네게 대한 조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난 알고 있었으니까. 조던과 같은 남자와 살면 마음고생이 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야.] 그럼 조던은 자기의 마음을 샤리에 대한 흥미는 육체적인 면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는 털어놓았던 것일까? [조던의 진의를 알고 계셨다면 왜 제 결혼을 승낙하셨어요? 어떤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인지 아버진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러나 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네 자신도 결혼을 원했지 않니?] [네, 그래요.] 샤리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샤리야! 너 정말 행복하니?]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 된다...샤리는 이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알고 계시잖아요. 저도 조던도 행복해요.] 샤리는 생긋 웃어보였다. [자,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이제 슬슬 돌아가기로 해요. 저녁식사에 늦겠어요. ] 샤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귀가했을 때는 벌써 일곱 시가 넘었기 때문에 샤리는 조던이 어제처럼 거실에서 초조해 있지 않을까 은근히 두려워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샤리는 주방으로 가 가정부에게 물었다. [무슨 연락 없었나요?] [오후에 주인님께서 전화를 하셨는데요. 오늘 밤은 일 때문에 늦어질 거라고 하시던데요.] 가벙부의 보고에 샤리는 가슴이 저려오는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도망치듯이 주방을 나오자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더블 침대가 자신을 조소하고 있는 듯 했다. 조던은 바로 어제밤에 이 침대에서 나와 사랑을 나누었으면서도 벌써 다른 여자와 만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5년전처럼 울적해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 잡아도 어느새 기분은 하향곡선을 타고 있었다. 오늘밤 조던의 귀가 시간 전에 잠들어 버리든지 아니면 태연한 체하자. 샤리는 마음을 정했다. 아버지는 조던이 아직 안 돌아왔다는 말에 적이 놀라는 눈치였으나 샤리는 사없 때문에 늦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태연해 했다. 아버지는 샤리를 위해 셰리를, 자기 잔에는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사업 때문이라니까 얘긴데. 나도 슬슬 사무실에 나가봐야겠다. 이제 아픈데도 없고 하니까.] [서두르실 것 없어요. 마일즈가 대신 잘 하고 있는데요. 좀더 쉬시는 게 좋겠어요.] 다행히 아버지의 조수인 마일즈는 20년간이나 아버지 밑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일을 잘 처리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미일즈에게 맡기세요. 전에도 그러셨잖아요.] [그렇지만...] [아직 사무실에 나가시는 건 무리예요.] 샤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마일즈에게 서류를 갖고 오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집에서 대충 일을 보실 수 있잖겠어요?] [그러나 역시 사무실에 나가는 편이...] [그건 절대로 안돼요. 집에서 일을 보시든지 쉬시든지 양자택일 하세요.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가 편히 쉬신다는 조건부로 퇴원을 허락해 준거예요. 다시 입원이라도 하시게 된다면 큰일이예요.] 고집이 센 아버지를 향해 샤리는 반위협적으로 타일렀다. [알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겨우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단념했다. [네가 갑자기 보스라도 된 것 같구나.] [아버지의 딸이며 조던의 아내인걸요. 무리도 아니죠.] 샤리는 마치 뽐내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말이다, 조던에 대해서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느냐/] [으응...아니요.] 샤리는 생긋 웃으며 부정했다. 저녁 식사 후에 두 사람은 레코드를 들었으나, 아버지는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샤리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침실로 모시고 가서 자리에 뉘었다. 한 시 직전에 차가 집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늦는 것은 조던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샤리의 얼굴은 노여움에 일그러졌으나 계단에 그의 발소리가 울려 왔으므로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방문 앞에서 2,3초 망설이다가 그는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서 잡지는 보는 체 하고 있는 샤리쪽에 홀끗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샤리는 펼친 잡지 사이로 몰래 그의 거동을 살폈다. 짙은 회색양복이 잘 어울리는 늠름한 체구,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단추를 위에서 두 개쯤 끄른 조던의 모습은 샤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문을 조용히 닫으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샤리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아버지와 둘이서 바닷가에 갔었어요.] 샤리는 잡지를 옆에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로드 아줌마한테 들었어. 브라이튼에 갔었다면서?] [네, 그래요.] 조던은 어젯밤 일이나 오늘밤 일로 내가 소란을 피울 것이라는 빗나간 예측을 했을 것이다. 샤리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생선 고로케를 먹었어요. 그리고 솜사탕도 먹었는데, 얼굴이 온통 솜사탕 투성이가 됐지 뭐예요.] [당신 아버지가 무척 즐거워하셨겠군.] 조던은 냉담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기운이 나신다면서 사무실에 나가 일을 보셔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셨고요.] 샤리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마일즈에게 서류를 갖고 오도록 한 경위를 얘기해주었다. [잘 했군. 역시 당신은 영리해.]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오늘은 바쁘셨던 모양이죠?] 샤리는 부드럽게 물었다. 조던은 샤리를 쏘아보았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위로하는 표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응, 눈코 뜰새 없djj.] [샤워를 하고 오면 예전처럼 목 마사지를 해드리겠어요. 기분이 풀린다고 하셨잖아요.] 샤리는 천연덕스럽게 권했다. 목과 어깨를 애무해 주면 언제나 조던은 피로가 풀린다고 했었다. 그 뒤에는 으레 샤리의 몸을 요구했었지만. 조던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샤리, 우리가 화해했다고 생각해도 될까?] [목을 마사지 해 드린다고 말했을 뿐이예요. 하지만 생각이 없으시다면 전 자겠어요.] 샤리는 졸리다는 듯이 자리에 누우며 하품까지 해보였다. [아니, 해줬으면 좋겠어. 금방 샤워하고 오지.] 그는 2분후에 돌아왔다. 머리는 젖은 채였고 허리에 타월을 둘렀을 뿐인 모습이다. 그가 마사지를 받기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엎드려 눕는 모습을 보고 샤리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샤리의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는 분명히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샤리의 마음속은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으음.] 샤리가 그의 등뼈를 따라 가볍게 손끝으로 마사지 해나가자 그는 기분이 좋은 듯이 신음했다. [당신 솜씨는 여전하군.] [기분이 어때요?] 샤리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양손으로부터 근질근질한 흥분이 온 몸으로 퍼져 갔다. 조던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돌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군. 오늘 밤은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노먼슨이 뉴욕에서 왔기 때문에 그를 만나야 했어. 당신도 그 사람은 알겠군.] 샤리는 노먼슨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던의 사업상의 친구인데, 저녁 식사에 두 차례나 초대한 적이 있었다. [알고 있어요.] [왠만하면 일찍 들어오려고 했지만..] [괜찮아요. 아버지와 둘이서 즐겁게 보냈으니까. 당신한테는 사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잖아요.] 샤리는 마사지를 계속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 일이라니요?] 샤리는 냉정하게 굴겠다는 다짐도 잊고 날카롭게 반문했으나, 이내 자신을 되찾고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어젯밤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조던은 홱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옅은 녹색의 실크네글리제를 통해 보이는 샤리의 봉긋한 가슴을 거리낌없이 쳐다봤다. [그 말 진심이야?] 그는 목이 잠긴 소리로 속삭이면서 팔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결혼한 부부예요. 조던. 섹스를 나누는데 전혀 어색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샤리는 미소까지 띠면서 자연스럽게 받아 넘겼다. [하지만 내게 아주 돌아온 건 아니잖아?] 조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샤리를 추궁했다. [하룻밤 체험만으로 앞일을 결정할 수는 없죠.] [어쩌자는 거지? 말 그대로 결혼은 했지만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란 건가? 마음이 내킬 때의 공인된 정사상대?] 조던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한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아직은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샤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조던은 불끈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타월을 집어 던지고 가운을 걸치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세요?] [한 잔 마시고 싶군.] 방을 나가는 조던의 분위기는 차가운 냉기가 날리듯 입술이 굳게 닫혀 있었다. 샤리는 스탠드만 남기고 방안의 불을 다 껐다. 샤리 역시 착잡한 기분으로 조던이 너무 마시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5분도 채 되기 전에 침실로 다시 올라왔다. 얕은 잠이 들었던 샤리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는 침대 위에 오르려다가 눈을 뜬 샤리를 안아 들었다. [당신이 필요해! 싫은가?] 샤리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싫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조던.] [왜 싫다고 하지 않는 거지?] 그는 샤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아내로서 나를 보는 게 아니야. 그런데 잠자리는 같이 하고 싶다는 건가?] [당신은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솜씨가 뛰어나니까요.] [그렇군.] 그는 속삭이듯이 말하며 샤리의 어깨를 천천히 침대에 고정시켰다. 하지만 조던의 애무에서 부드러움을 찾을 수는 없었다. 샤리의 머리가 왈칵 젖혀지며 억눌려 있던 욕구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샤리는 온 몸으로 단단해진 그의 육체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격렬한 욕망으로 거칠게 그녀를 탐하는 그의 입술은 쉽게 떨어질 줄 몰랐다. 불규칙한 리듬으로 빼앗듯 그녀의 몸을 격렬하게 더듬었다. 샤리 역시 매달리다시피 조던의 목을 끌어안았다. 몸 전체가 통채로 불속에 던져진 듯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거친 호흡을 내쉬는 그의 뜨거운 호흡이 샤리를 더욱 세차게 감싸안았다. 터질 듯이 단단해진 그의 남성이 그녀의 허벅지를 스치듯 지나며 입술이 차츰 아래로 내려오자 그녀는 토해내는 듯한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등이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 그녀는 격렬한 욕정에 사로잡혀 심한 몸부림을 치며 적극적으로 그를 향해 자신을 열어갔다. 결국 자제심을 잃은 그는 격렬한 파장을 그리며 그녀의 중심을 향해 깊고 거친 허리운동을 시작했다. 파고 들 듯이 한 덩어리로 녹아들던 두 사람은 고통에 가까운 세판 파장을 그리며 폭발했다. [애인이 있나, 샤리?]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문득 조던이 물었다. [없어요.] 샤리는 그에게 질투심을 불어넣어 주고는 싶었으나, 그같이 격렬한 사랑을 나눈 후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연기를 내뿜으며 조던은 샤리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와 여행만 했기 때문에 겨를이 없었어요.] [즉 바빠서 애인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는 입이 한일자로 굳어지며 차갑게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샤리는 애인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다. 조던을 안 뒤로는 어떤 남자에게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사실이다. [그래요.] 샤리는 거짓말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 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럼 지금은 시간적 여유가 생긴 셈인가?] 조던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네.] 조던은 피우다 만 시가를 재떨이에 짓뭉갰다. [그럼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는 않겠군?] 조던은 땀에 젖은 몸을 다시금 욕망으로 긴장시키며 샤리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누군가가 문을 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샤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조던은 벌써 일어나 가운의 벨트를 매고 있었다. [누굴까요? 무슨 일이지?] [나도 모르겠군.] 조던은 홱 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큰일났어요. 이걸 보세요.] 가정부는 당황한 표정으로 신문을 내밀었다. 조던은 신문에 흘끗 시선을 보냈다. [첫번째 문제가 발생했군!] [아버님께서 이 신문을 벌써 보셨나요?] [네, 그래서 제가...] [알았습니다. 됐어요.] 조던은 결연히 말했다. [내게 맡겨요. 아버님은 지금 방에?] [네, 무척 놀라신 것 같아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조던?] 샤리도 침대에서 일어나 두 사람 얘기에 끼어들었다. 조던은 그녀에게 신문을 건네 주었다. '실업가 데비드 데일 씨, 사고로 인해 기억 상실' 큼직한 타이틀이 샤리의 눈에 뛰어들었다. 6장. [어머, 어떻게 신문사에서?] 샤리는 크게 놀랐다.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오. 의사선생님을 어서 오시게 해요. 난 아버님 곁에 있을 테니까 당신은 빨리 전화를 걸어요.] 조던은 재빨리 침착을 되찾았다. [알았어요. 얼른 전화 걸고 오겠어요.] 존스 의사는 10분 이내로 달려오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샤리는 급히 짙은 감색 바지와 옅은 청색 블라우스로 갈아입고 아버지 침실로 달려갔다. [난 사실을 알 권리가 있어! 어린애가 아니니까 과잉 보호는 하지 마라.] 노기를 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하셔야 합니다. 어린애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조던이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럼 왜 숨기고 있었나?] [그건...] [아버지!] 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한 일이예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지. 의사 때문이야!] 아버지는 소리쳤다. [내가 5년간의 기억을 상실했는데도 그 사실을 본인에게 알리지 않은 건 대체 무슨 심보냐? 샤리, 난 마흔 여섯이 나이라 쉰 하나란 말이야. 그런데 넌 왜 웃ㄱ 있니? 아비 말이 그렇게 우습냐?] 아버지는 샤리에게 화풀이하듯이 대들었다. [우습잖고요. 아버지가 신경을 쓰시고 계신 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이가 들었다는 것 뿐이니까요.] 샤리는 응수했다. 아버지도 쓴 웃음을 지었다. [넌 상관없겠지. 아직 스물셋이니까. 하지만 난 쉰 한 살이란 말이야.]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샤리의 불안감은 약간 누그러졌다. 이윽고 의사가 달려왔고 환자와 둘이서 방에 들어갔다. 조던은 침실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어떻게 신문사에서 알았을까?]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샤리에게 물었다. 샤리는 침대 끝에 살며시 앉으면서 대답했다. [나도 통 짐작이 안 가요.] [우리 두 사람과 병원 관계자 외에는 누구도 모를텐데?] [병원 관계자 중 누가 누설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조던은 아버지의 기억 상실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면을 펼쳤다. [벤 더스튼 기자. 이 이름은 기억에 없는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소?] [아뇨. 제가 누설할 리야 없잖아요.] 샤리는 한마디로 부인했다. [나도 아니고...그렇다면 병원 관계자 중 누구겠군. 간호사중의 누구일지도 모르지.] 조던은 웃옷을 집어 입으며 말했다. [나가시려고요?] [벤 더스튼을 만나 보겠어. 그를 만나면 어디서 정보가 나왔는지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아 다행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사실을 알려 드릴 걸 그랬군.] [그렇군요. 하지만 의사의 지시였으니까..그런데 점심 때까지는 돌아올 수 있겠어요?] [기사의 출처가 판명되는 대로 돌아오겠어.] [그럼 점심식사를 준비하도록 아줌마한테 일러 놓겠어요.] [당신은 뭘 할 거야?] 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는 뭘 하고 있을까ㅛ?] [샤리, 우린 서로 진지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어.] [뭐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는데요?] [어제는...]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조던. 어젯밤이 지루한 밤이었다면 별 문제지만.] 조던은 희미한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알고 있을텐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육체 관계만으로 우리 사이를 계속 유지한다는 게 충분한 건가?] [왜요? 우린 결혼한 부부예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그만해요.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피곤해요. 어서 볼 일이나 보세요.] [갔다와서 얘기하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어요.] 샤리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샤리가 아버지 침실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존스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가벼운 쇼크 증세만 있고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의사는 왕진가방을 잠그면서 말했다. [다행이야.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5년이나 진보했는데도 가벼운 쇼크를 받았을 뿐이라니..이거야 원.] 아버지는 빈정거리듯이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가벼운 쇼크라고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절대 안정하셔야 합니다. 가벼운 식사, 충분한 수면을 취하셔야 합니다. 수면제를 드릴 테니 복용토록 하세요.] 의사는 꾸짖듯이 주의를 주었다. 아버지는 시무룩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싶은 눈치였으나 이내 피곤하다는 듯이 베개에 기대어 누웠다. 샤리와 의사는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아버님께서는 푹 쉬셔야 합니다.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하게 계시지만, 5년간의 기억을 완전히 잃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울증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잘 이해시켜 드리고 심신을 안정시켜 드려야 합니다.] [조던과 최선을 다해 보겠어요.] 샤리는 말했다. [만약 상태가 나쁜 듯 싶으면 전화로 연락해 주십시오. 어쨌든 내일 다시 진찰하러 오겠습니다. 앞으로는 조금씩 단편적인 기억이 되살아 날 테니까 힌트를 자꾸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멀지않아 완전히 기억을 되찾으실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조던과 같이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아버지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버지는 쇼크를 잘 견디어냈다. 샤리와 뜰에서 점심식사를 들었는데, 창백했던 얼굴에 핏기가 올라 있었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조던이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샤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지 않기로 했다. [자, 낮잠 주무실 시간이니까 방에 들어가셔야 해요.] 샤리는 일어섰다. 아버지는 샤리와 나란히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한 시간 가량 자면 안 될까?] 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안돼요. 의사의 지시니까.] 샤리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끌어 의자에서 일으킨 다음, 컵에 물을 따라 수면제를 들게 했다. [5년 사이에 꽤 억세졌군.] 아버지는 약을 넘기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샤리는 웃으면서 상냥하게 받아넘겼다. [제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예요, 아버지.] [너무 놀라게 하지 않는 게 좋을걸. 늙은이에게 쇼크를 주는 건 안 좋아.] 층계를 올라가면서 아버지는 또 중얼거렸다. [늙은이라니요? 아버지는 아직 젊으셔요.] 샤리는 웃었다. 아버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쉰살은 되고 싶지 않았어.] [아버지는 당당하게 쉰살의 생일을 맞았었어요. 파티를 열고 축하를 해드렸지요.] 아버지 몸에 담요를 덮어주면서 샤리는 일깨워주듯이 말했다. [이 집에서?] 아버지의 음성에는 벌써 졸음이 섞여 있었다. [아뇨, 물론 이 집에서는...아니에요, 틀려요.] 샤리는 하마터면 실토할 뻔했다. 사실 조던과 별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우린 프랑스에 있었어요.] [참 그랬었구나, 너와 조던이 프랑스에 있던 내게로 와 주었었지.] 아버지의 쉰 번째 생신날 조던이 어디 있었는지는 샤리도 모른다. 그는 축하전보를 보내오기는 했지만... 샤리는 그 이상 생일 파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커튼을 닫아 햇살을 막았다. [편히 주무세요, 아버지.] 그녀는 아버지 이마에 키스하고 방에서 나갔다. 아래층에는 아직 조던이 귀가한 흔적은 없다. 뜰에 나가 샤리는 혼자서 쏟을 곳이 없는 분노를 참았다.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문사에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라도 있었던 것일까? [전화예요, 아씨!] 가정부가 집안에서 샤리를 불렀다. [네, 샤린데요.] 샤리는 수화기에 대고 고함치듯이 대답했다. [샤리?] 태평스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는 급히 헤어져 버려서 미안했어.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야 없지 않니?] 매기는 스스럼 없이 말했다. 샤리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매기. 네게 화를 낸 건 아니야ㅑ.] [조던 때문에?] [그래.] [그럼 그 사람 지금 집에 없니?] [그래.] [그렇다면 나한테 와. 내 디자인 좀 봐 줘. 넌 감각이 있으니까.] [고맙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샤리는 아버지 일을 설명했다. [그럼 한 시간 정도도 안 되겠니? 아버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조던도 없으니까 한 시간쯤은 시간을 낼 수 있지 않니?] [알았어. 15분 안으로 갈게. 기다려.] 그러고는 샤리는 급히 주방으로 갔다. [나 한시간만 나갔다 오겠어요.] 가정부에게 알렸다. [아버지는 괜찮아요. 약을 드셨으니까 두 세시간은 주무실 거예요.]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면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이틀 전, 그녀가 늦게 돌아왔을 때 조던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가정부인 마크로드는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던 쪽이 늦고 있다. 가정부는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샤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한 시간 안에 돌아온다고 전해 줘요.] 그녀는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 조던은 제멋대로 상상하며 화를 내겠지. 매기의 아파트는 소유주에 걸맞게 분방한 분위기였다. 흰 벽에 걸린 추상화, 초현대적인 가구, 그리고 흑백 타일의 바닥에는 깔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매기 자신은 빨간 천을 잇대어 기운 드레스를 걸치고 있어 흡사 집시 여인 같았다. [너 몸이 몹시 피곤해 보인다.] 샤리를 얼싸안으면서 매기가 말했다. 샤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젯밤 샤리와 조던이 잠든 것은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였던 것이다. 매기는 샤리를 거실로 안내하자 곧 마실 것이 든 글라스를 건네 주었다. [너와 조던은 아직..?] [매기!] 샤리는 울컥하여 말을 가로막았다. [사생활에 관계되는 질문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 매기가 수상쩍다는 듯이 샤리를 응시했다. [네 말투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에게 또 유혹당한 건 아니겠지?] [그런 일 없어!] 샤리는 꿀꺽 글라스 속의 액체를 마셨는데, 왠걸 그것은 위스키였다. 샤리는 숨이 막혀 쩔쩔 맸다. [어머 이거 술이잖아! 내가 술을 못 한다는 걸 잊었니?] 그녀는 등을 쓸어주고 있는 매기에게 항의했다. [미안해. 깜빡 잊었지 뭐야. 이젠 괜찮니?] [응, 좀 나아졌어.] 샤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내 디자인을 봐줄 수 있겠어?] 매기는 작업 테이블 위의 스케치 북을 펼쳐 보였다. 샤리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한 두 개 골라냈다. 매기가 조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지 못하도록 스케치북에 열중하는 척 했다. [이 디자인이 제일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그건 내 작품이야. 그걸 요구하고 있는 곳도 있단다.] 매기는 상세한 설명을 시작했으나 샤리는 건성으로 들을 뿐이었다. 지금쯤 조던은 돌아왔을까? 아버지 기사의 출처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몹시 신경이 쓰였다. [이 계약에 사인만 하면 수년 동안은 미국에 돌아갈 수 없게 돼.] 매기는 계속 얘기했다. [네 아버지가 가게를 차려 주신다고 하셨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매기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매기가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남자친구 탓이라고 샤리는 짐작했다. [응, 그 사람 내 아파트로 이사오고 싶대.] [그 사람과 결혼할 셈이니?] 샤리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넌 여전히 순진하구나, 샤리.] 매기는 딱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결혼할 마음은 없어. 게다가 그 사람에겐 부인이 있어.] 샤리는 깜짝 놀랐다. 매기는 옛날부터 솔직하고 제멋대로 행동해 왔으나, 그렇더라도 이것은 너무 지나치다. 좀 별난 남자친구들도 많이 있었지만 기혼 남성은 처음이다. 샤리는 자기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여 언짢은 마음이 들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디자인, 마음에 들었어. 만약 네가 런던에 머무르고 싶다면 그 가게와 계약하는 게 제일 좋겠다.] [하지만 남자친구 건은 마음에 안 들었겠지?] 매기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인생이야.] 샤리는 가볍게 받아 넘겼다. [결혼에 실패하고 있는 내가 너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없어. 너처럼 사는 방식이 좋을지도 모르니까...] 샤리는 힘없이 웃었다. 매기는 고개를 저었다. [너 아주 달관했구나.] [현실적이 됐을 뿐이야. 그럼 내주에 점심이라도 같이 하기로 하자.] [좋아. 죄많은 인생을 택할 것이냐, 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냐..결심이 서면 알려 줄게. 하지만 아마 미국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매기의 남자친구가 기혼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5년 전부터 그런 예는 드물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고 있다. 샤리 자신은 그런 풍조에 반발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녀만의 문제였다. 샤리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조던의 메르세데스벤츠와 나란히 낯선 차가 세워져 있었다. 누가 찾아왔을까? 남자들의 즐거운 듯한 얘기 소리에 섞여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손님은 아마도 거실에 있는 듯 싶었다. 샤리는 거실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샤리가 모습을 나타내자 웃음소리는 뚝 그쳤다. 아버지와 조던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손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샤리는 금발을 보자 숨을 죽였다. 설마 안젤라 디바인이? [아, 샤리.] 조던은 일어나 샤리가 서 있는 문께로 다가갔다. [달링, 지금까지 어디 가 있었지?] 그는 샤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려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술을 마셨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 마셨어요!] 샤리는 도전하듯이 조던을 쏘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와 손님 쪽으로 애교가 넘치는 얼굴을 돌렸다. 손님은 안젤라 디바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던의 예전 비서보다도 아름다운 예쁜 여성이었다. [이분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어요, 달링?] 샤리는 천연덕스럽게 재촉했다. [앤과는 벌써 구면이잖아, 샤리. 새삼스럽게 소개가 다 뭐야.] 아버지가 우습다는 듯이 참견했다. [앤?] 샤리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분은 앤 페로즈 양이야, 달링.] 조던도 놀리는 듯한 말투다. 앤 페로즈! 그럼 이 여성은 아버지의 간호사인 것이다. 제복을 벗은 그녀는 몰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핑크빛 꽃무늬의 스커트와 얇은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은 참으로 여자다운 매력에 넘쳐 있었다. 30대 전반쯤 되었을까? 샤리는 조던과 앤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자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했어요. 미스 페로즈. 제복을 벗으셔서...] 샤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 옆에 앉았다. [아버지가 입원하고 계신 동안에는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천만에요. 제복에는 많은 사람들이 속지요.] 앤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속은 사람중의 하나지.] 샤리의 아버지는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앤도 웃었다. [어머나 농담도 참 잘 하세요.] [아버님도 여성에 관해서는 눈이 높으시지요.] 조던이 끼어들었다. [어머, 로드씨까지!] 앤은 생글생글 웃었다. [남자들은 모두 늑대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미스 페로즈?] 샤리는 마음속의 질투심을 누르며 짐짓 비꼬듯이 말했다. [네, 정말이예요. 참, 저를 앤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버님은 이제 제 환자가 아니시니까 딱딱한 인사 치레는 없애는 게 좋겠어요.] 딱딱한 인사치레는 없애기로 하자고? 샤리는 앤 페로즈가 조던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있었음을 상기했다. 그리고 지금, 조던도 앤에 대한 찬미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이건 흡사 편집증이 아닌가.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요. 근무시간이 다 됐군요.] 앤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일어섰다. 아버지도 뒤따라 일어서면서 말했다. [병원까지 동승합시다.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샤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딜 가시는데요?] [병원, 존스 선생이 다시 검사를 해야겠다고 하니까 병원에 가봐야겠어.] 아버지는 밝게 대답했다. 샤리는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린채 물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이 미스 페로즈..아니 앤을 일부러 마중 보냈나요?] [아니예요.] 앤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마침 저도 출근하는 길이라 모셔다 드리려고 잠시 들렀을 뿐이예요.] 의심이 다시금 샤리의 마음에 솟구쳐 올랐다. 앤의 설명에는 납득이 잘 안가는 점이 있다. 왜 일부러 환자의 집에 들렀을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틀림없이 조던이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샤리는 어색하게 사의를 표했다. [그럼 옷을 입고 올 테니까...] 아버지는 다시 앤 페로즈를 향해 말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앤 페로즈는 아버지에게 웃어 보였다. [제가 차를 운전해서 아버지를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좋잖겠어요? 검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로 닫시 모셔올 수 있으니까요.] 샤리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검사를 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르고, 또 널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전 괜찮아요.] [아버님을 미인과 동행해서 가시게 하지 그래, 샤리?] 조던이 참견했다. [아버님 연세로 보아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을 테니까 말야.] 그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연세라니요? 아직 정정하신데요, 뭘.] 앤 페로즈도 장난기를 띤 말투로 응수했다. [자, 농담은 이제 그만 하고 어서 갑시다.] 아버지는 앤을 재촉했다. 앤은 샤리와 조던 쪽으로 돌아섰다. [두 분을 다시 만나게 돼서 즐거웠어요. 그럼 또 근일 중에..] 그녀는 미소지으며 인사를 했다. [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던도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샤리는 그 미소에 가슴이 철렁했다. 비웃음도 잔인성도 없는 순수한 미소- 조던은 일찍이 그녀에게도 그런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이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샤리는 조던에게 대들었다. [오늘은 앤 페로즈 외에 무슨 수확이 있었나요? 혹시 그 여자가 아버지 일을 신문사에 누설한 장본인인가요?]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조던은 샤리의 입을 다물게 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벤 더스튼 기자의 신원이나 그가 어떻게 해서 정보를 입수했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더군. 오전 내내 편집 책임자 중 한 사람을 간신히 설득하여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거기서 끝이야. 그 친구도 벤 더스튼 기자는 프리랜서라는 것만 가르쳐 줬을 뿐이야. 가끔 재미있는 기사를 갖고 온다더군. 그래서 모두들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거야. 그는 말하자면 신문사에 있어서 가치 있는 존재라더군.] [그럼 결국 헛수고였겠군요.] [그래.] [그럼 왜 전화를 하지 않으셨어요?] 샤리는 잔뜩 골이 나서 그를 책망했다. [당신이 마크로드 부인한테 행선지를 알리기를 거절했던 것과 같은 이유겠지. 당신에게 관계없는 일로 생각했던 거야.] 조던은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행선지를 알리는 걸 거절하지는 않았어요. 한 시간 가냥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죠. 제 행동을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점심식사는 별 문제예요. 시간 내에 돌아오겠다고 해놓고서 돌아오시지 않았으니까 폐를 끼친 셈이 된 거죠.] [마크로드 부인은 오늘 점심을 샐러드였다고 하던데, 샐러드라면 별로 폐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 [제게는 폐가 된 거예요.] 샤리는 양보하지 않았다. [당신은 오늘 오후에 어디 가 있었어?] 조던이 험악한 표정으로 힐문했다. [그냥 나가 있었어요.] [어디 갔었느냐고 묻고 있잖아?] 샤리는 도전하듯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밖에요.] [술 마셨지?] 그는 거칠게 말했다. [딱 한 모금.] [한 모금이라고?] 그는 격렬한 어조로 추궁했다. 그는 굉장히 화를 내고 있었으며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고 샤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상관없다! 샤리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네, 많이 마셨어요. 왜, 안 되나요?] 조던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뒤흔들었다. [누구와 마셨지? 상대는 누구야, 샤리?] [매..매기예요.] 샤리는 조던의 다그치는 서슬에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조던의 이글거리는 두 눈과 드러난 이빨이 그의 격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정말 매기와 마셨다니까요.] 샤리는 겁이 나 되뇌었다. [거짓말 마! 오늘 오후에 당신과 같이 있었던 녀석이 누구지?] [전에 애인 따위는 없다고 말했었죠? 지금까지 애인을 가져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 애인이라는 놈의 집에 갔었나? 아니면 호텔?] [매기의 아파트에 갔었어요. 정말이예요.] [끝끝내 거짓말이군!] 조던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 정 믿지 못하겠다면 매기한테 전화는 걸어 확인해 보세요. 자, 어서요.] 조던의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분노에 당황한 샤리는 매기에게 전화하도록 필사적으로 권했다. 조던은 괴롭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 여자한테 전화를 하라고? 농담하지 마! 그 여자는 날 괴롭히는 일이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할 여자야. 그리고 당신이 미리 그 여자와 짰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 말은 아예 믿지를 않는군요. 정말 매기와 둘이서 술을 마셨어요. 계속 믿지 못하겠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피곤하고 머리도 아파요.] 샤리는 어쩔줄 몰라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겉으로는 냉정하게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마시지도 않던 위스키는 왜 마신 거야?] [우연히 마시게 된 거예요. 위스키인 줄 모르고요. 아! 이게 무슨 짓이예요?] 샤리는 비명을 질렀다. 조던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그는 그대로 성큼 성큼 거실을 나왔다. [조던 절 어디로 데리고 갈 셈이세요?] [이층!] [이층? 왜요?] 샤리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왜냐고? 왜 그런지는 자신이 잘 알텐데?] 조던은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샤리는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싫어요, 조던. 이런 짓 하면 안 돼요!] 샤리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앙탈 부리지 마! 당신에게 사실을 고백시킬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야. 그 방법을 쓰면 당신은 오늘 오후 누구하고 어디에 갔었는지 사실대로 실토하게 되겠지.] 분노가 극에 달한 조던의 처음 보는 모습에 샤리는 몸을 떨었다. 조던은 샤리가 용서를 구할 때까지 그녀의 몸을 농락할 셈인 것이다. 7장.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냉랭하게 등을 돌린 채 옷을 입고 있는 조던- 샤리는 손을 뻗쳐 그의 등을 애무하고 싶었으나 간신히 그 충동을 참았다. 조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몸에 걸치고 있었던 옷은 조던이 모조리 벗겨 버려 바닥에 흩어진 채였다. 그중에는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옷도 있었다. 조던은 단추나 후크를 끄르는 것도 아깝다는 듯이 서둘렀다. 샤리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난폭하게 벗겨 버린 다음 조던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학대하려는 듯이 거칠게 그녀의 몸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샤리는 부끄러움도 잊고 열기에 휩싸인 채 그에게 매달려 오후에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우악스러운 사랑의 행위였으나, 조던을 사랑하고 있는 샤리에게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던은 심장의 고동조차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는 지금, 샤리에게 들을 돌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조던..] 샤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뭐지?] 한마디뿐인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절 믿어주시는 거죠?] 샤리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 그의 등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는 홱 몸을 뺐다.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암, 믿지. 당시은 잠자리 속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못 하니까.] 그는 일어나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그대로 나가 버렸다. 샤리는 베개에 엎드려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샤리는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육체적 존재일 따름인 것이다. 그것을 굴욕적인 방법으로 그는 증명해보였다. 더 이상 이러한 상태로 그와의 관계를 계속할 수 없다. 마크로드 부인에게 부탁해서 침실을 따로 갖도록 하자. 아버지는 저녁 식사전에 병원에서 돌아왔다. 조던과 아버지가 식전주를 즐기고 있을 때, 샤리는 가정부를 붙잡고 침실 건을 끄집어냈다. [어머 모르셨어요? 벌써 그렇게 준비했는데요?] 샤리의 부탁에 가정부는 오히려 의아해했다. [벌써 준비를 했다니, 무슨 말예요?] [주인님 명령으로...] 샤리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이가 그렇게 말했나요?] [네, 주인님의 불면증이 아씨의 안면을 방해하니까 따로 주무셔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요... 준비를 했다니까 됐네요. 가서 일 보세요. 아줌마.] 샤리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던도 더 이상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5년 전에 비해서 이번에는 너무나 일찍 권태기가 온 것이다. 만약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더라면 필시 비참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잠자리 속에서는 몰라도 일상 생활에서는 냉담한 태도를 취해 왔던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샤리는 지금 바로 조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절망적인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자기쪽에서 거부했다면 승리감 비슷한 기쁨이나마 있었으련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은 역시 견딜 수 없는 쇼크였다. 샤리가 루즈로 입술을 다듬고 있을 때 조던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루즈 빛깔만 두드러져 보였고, 침착성을 잃은 듯 안절부절했다. [아버님이 저녁식사를 안 하시고 기다리고 계셔.] [죄송해요.] 샤리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가요.] [샤리...] 조던은 길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겁 먹을 필요는 엇어. 조금 전과 같은 짓은 두 번 다시 안 할테니까. 오늘밤부터는 다른 방에서 자기로 했어. 이 집에 있는 한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그는 아버지가 완전히 회복하면 즉시 이 집에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샤리가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그가 지금 말로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 셈이다. [그렇게 하는 게 제게도 좋아요.] 샤리는 간단하게 받아넘겼다. [생각했던 대로군.] 조던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날 밤, 샤리는 거의 아버지하고만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병원행은 성공인 것 같았다. [존스 선생은 매일 두 시간 정도 병원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구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는 편이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샤리는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존스 선생의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마일즈에게도 당분간 더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럼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안 오나요?] [응, 지금의 내 상태로는 설령 일에 손을 댄다 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비즈니스의 세계가 특히 숨가쁘게 돌아간다는 것만은 나도 잊지않고 있으니까. 지금의 내 상태는 독수리 떼에 둘러싸인 병아리와 똑같아.] [저도 그 독수리 떼의 한 마리겠죠?] 조던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제일 큰 놈이지. 또 제일 교활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웃으면서 응수했다. [칭찬하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서 샤리를 빼앗은 방법은 좋지 않았어. 너무 급히 서두른 나머지 무례했었지.] [그건 다른 문젭니다. 제가 샤리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무례한 놈으로 책망받아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겠지요.] [뭐라고? 아아, 그렇던가?] 아버지는 웃었다. [무슨 말씀들이세요? 저는 통 모르는 말들만 하는군요. 그만들 하세요.] [조던은 널 놀리고 있었을 뿐이야.] 아버지는 부드럽게 달랬다. [샤리는 놀림받는 게 싫답니다.] 조던이 비웃듯이 말했다. [네, 싫어요. 그런 일에 관해서는요.] 샤리는 눈을 크고 뜨게 응수했다. 조던은 못 당하겠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제 자기로 할까. 그럼 내일 보세.] 아버지는 피곤하다는 듯이 하품을 연신 하더니 침실로 물러갔다. 두 사람만 남자, 조던은 바로 일어나 위스키를 따라 마셨다. [아버지를 놀라게 해서, 아니지 곤란하게 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군. 아버지를 곤란하게 해서 침실로 몰아냈으니 당신은 만족했겠지?] [제 탓이 아니고 당신 탓이예요. 마치 은혜를 베풀어 저와 결혼해 준 듯이 말한 게 잘못이예요.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육체 관계는 계속했을 거다..라는 인상을 주었으니까요.] 샤리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랬던가?] [알고 있으면서도!] 샤리는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시은 정말 자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예요!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잘 리가 없죠. 절대로!] 그는 냉담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마강T다. [그럴까?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그만해요. 차라리 내게 싫증이 났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요?] [난 한번도 당신에게 싫증을 느낀 적은 없어. 당시은 내가 당신 일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책하지만, 당신 역시 날 이해하려고 노력해 준 적은 없었잖아. 아마 우리는 두 사람 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두려운 거지.] [두려웠다고요? 당신이 태어난 이래 한번도 두려움 같은 건 느껴보지도 못한 주제에!] 샤리는 비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날 전혀 모르고 있어.] [맞는 말이예요. 나는 항상 당신의 겉만 핥아 왔어요.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건 당신 쪽이예요. 조던. 당신은 언제나 어린애 다루듯이 내 속마음을 금방도 알더군요.] 샤리는 언성을 높였다. [그쯤 했으면 속이 후련해졌을 거야. 이제 입씨름은 그만하고 자도록 합시다, 샤리.] [자자고요? 당신이나 주무세요. 여전히 말을 할만 하면 피하는 군요. 왜 그러죠?]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서야. 쉬어요, 샤리.] 그는 나가버리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샤리는 꾹 참았다. 어째서 그는 대화를 피하는 것일까? 나를 경멸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주면 될 것을.. 그에게 있어 여자는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샤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조던이 없는 침대는 지나치게 크고 썰렁했다. 그녀가 임신을 알린 뒤와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 쓰디쓴 추억이 되살아났다. [아내한테 들킬 일은 하고 싶지 않군.] 조던의 목소리에는 즐기고 있는 듯한 여운이 깃들어 있었다. 샤리는 마침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는데, 본능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안젤라가 자신 만만하게 웃으며 [들킬 리가 없잖아요.] [내 아내를 전혀 모르고 있군. 그 사람은 여간 독점욕이 강한 여자가 아니야. 게다가 부친은 실업계의 거물이야. 일이 성가시게 될지도 몰라.] [그런 이유로 우리 사이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안젤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겠지.] 목소리로 보아 그는 여전히 재미있어 하는 듯 했다. [조던 샤리가 아기를 해산하기 전에 휴가를 얻을 수 없을까요? 샤리의 해산 후에는 당신이 바빠질 것 같아서 그래요.] [2,3일 정도라면 시간을 낼 수도 있겠지. ok, 안젤라. 당신이 계획해서 출발 날짜가 정해지면 내게 말해.] [어머 정말이세요? 고마워요, 조던. 지금 곧 준비를 하겠어요.] 안젤라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그 순간 충격을 받은 샤리는 정신없이 울면서 빌딩을 뛰쳐나왔다. 결국 유산까지 하고, 조던이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 그를 냉정하게 거절했다. 샤리는 괴로움에 신음했다. 그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제 잠들기는 다 틀렸다. 그녀는 일어나 진즈와 점퍼를 입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산책이라도 하면 조금은 신경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런던의 아침은 비록 시간이 이르다 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 수작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무시하면서 샤리는 걸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목적도 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떤 부류의 여자로 간주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샤리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와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무사히 귀가해서 주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아직 새벽 네 시. 고요한 주방에 앉아 있자니 묘하게 으스스했다. 그때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누가 일어나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치고 계신지도 모른다... 또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신음 소리 같았다. 어떻게 할가? 아버지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 건 아닐까? 하지만 소리는 조던의 서재에서 난 것이었다. 샤리는 살며시 문을 열었으나 문은 삐걱거렸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카펫에는 빈 위스키 병이 뒹굴고 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정신이 없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던이었다. 서재 안은 위스키 냄새로 가득했다. 바닥에도 엎질러져 있는 모양이다. 샤리는 처음 보는 조던의 흩어진 모습에 당황하여 어깨를 더듬었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떠 샤리를 쳐다보았으나 잿빛 눈엔 멍하니 초점이 없었다. [무...무슨 일이야?] 소리쳤으나 혀가 잘 돌지 않는다. [놔두고 저리로 가!] 그는 몸을 일으켜 샤리를 밀치려고 했다. [일어나요, 조던. 이런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침대로 가서 주무세요.] 샤리는 다시 눈을 감은 조던을 흔들었다. [당신이 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침대나 소파가 다를 게 뭐 있지? 당신이나 가서 자.] 조던은 잠에 취해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조던! 조던 일어나요.] 샤리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흔들어댔으나 취한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때 느닷없이 아버지가 나타났다. 이 자리의 상황을 한눈에 알아차린 듯 했다. [도와줄까?] 부드럽게 물었다. 샤리는 안심이 되어 미소를 띠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침대로 데려가야겠는데, 좀 도와주세요.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예요.] 잠든 줄 알았던 조던이 갑자기 비웃듯이 크게 웃어댔다. 몸을 뒤치는 바람에 소파에서 떨어질 뻔하면서도 떠드는 것이었다. [샤리는 제가 인사 불성이 될 만큼 취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감색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친 아버지는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파티를 열고 있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나.]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조던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네, 장인어른. 혼자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혼자...] 그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샤리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샤리. 당신 아버지께 왜 내가 혼자서 파티를 열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려요, 어서!] 그는 일어나려고 하다가 소파에 쓰러져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괜찮아. 말다툼이라도 한 거냐?] 아버지는 샤리의 어깨에 팔을 돌리면서 말했다. [네.] 샤리는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신경쓸 거 없다. 아무리 금실이 좋은 부부일지라도 싸움은 으레 따르는 법이야. 모든 일에 의견이 똑같으면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겠니.] [정말 그렇겠군요.] 샤리는 불편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악화된 나와 조던 사이를 짐작도 못하고 계신 것이다. 무리도 아니지. 그런데 조던은 왜 이처럼 곤드레가 될 정도로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조금 저느이 말다툼이 원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떻든 샤리는 아버지와 둘이서 조던을 일으켜 양쪽에서 부축하여 이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옷을 벗겨야 할 텐데. 거들어 줄까?] 침대에 누인 조던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는 물었다. [이대로 놔두지요. 조용히 잠들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구두는 벗겨야겠지만.] 샤리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구두를 벗겼다. [아버지도 어서 주무세요. 이제 됐으니까요.] [그럼 잘 자라, 샤리.] 아버지는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아침에 잠이 깨거든 조던에게 너무 바가지를 긁지 마라. 이런 일은 그에게 극히 드문 일이잖니.] 샤리는 의자에 앉아 조던을 지켜보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조던은 헛소리를 계속했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편적인 말뿐이었다. [아직 자고 있니?] 샤리가 아침 식사를 차린 테이블에 앉자 아버지는 놀리듯이 물었다. [네.] 샤리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조던에게 화가 안 풀렸니?] [조금은요.] 샤리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조던이 널 놀리던데 설마 그게 원인은 아니겠지?] [얼마간은 관계가 있어요.] 샤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고?] [부탁이예요, 아버지. 저를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 줄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래, 알았다. 누구 딸인데. 어련이 알아서 하겠냐?] [그건 그렇고, 날 병원까지 데려다 주겠니? 아직까지 운전은 하지 말라더구나.] 샤리는 생긋 웃었다. [물론이죠, 기꺼이 모셔다 드리겠어요. 좋으시다면 마중도 갈까요?] 그녀는 열심히 말했다. 조던이 눈을 떴을 때 되도록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중 올 필요는 없다. 앤 간호사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니까.] 앤 페로즈. 조던의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샤리는 머리를 흔들며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려 애썼다. 샤리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와 보니, 조던은 이미 사무실로 나간 뒤였다. 가정부의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루어 샤리가 생각했던 대로 조던은 무척 무거운 기분으로 출근한 듯 싶었다. [그이가 점심 식사 하러 들어오신다고 했어요?] 샤리는 가정부에게 물었다. [아뇨,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나가셨어요.] [그럼 모두 외식을 해야겠군요. 아버지는 병원에서 식사를 하실 테니까 나도 나가서 하겠어요.] 샤리는 거실로 가서 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오, 샤리!] 로라의 목소리는 반가운 듯이 활기를 띠었다. [너무 기뻐요. 전화를 해주셔서. 게다가 아주 타이밍이 좋아요. 실은 오늘 아침 기분이 어쩐지 우울해서 마침 기분전환이 필요하던 참이예요.] 샤리는 로라의 구김살없는 밝은 음성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심각한 건 아니겠죠?] [그렇지 않아요.] 로라는 웃었다. [출산 전 우울증이예요. 보시고 너무 놀라지나 마세요. 샤리.]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요.] [좋아요! 시간과 장소는 샤리가 정해요.] 샤리가 약속을 하고 수화기를 놓자마자 벨이 울렸다. 샤리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당신이군. 오늘 점심은 아무래도 밖에서 하게 될거 같아.] [그러실 줄 알았어요. 실은 저도 방금 점심 약속을 했거든요.] [점심 약속?] [네, 그래요. 안 되나요?] [당신이 누구와 함께 식사르 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지겠지. 또 매긴가?] [아뇨.] [그럼 누구지?] [오늘 아침 기분은 어떠세요?] 샤리는 일부러 그의 질문을 피했다. [말을 돌리는군. 머리가 아직도 멍멍해. 어제 실수는 하지 않았나?] 샤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만 계속 했어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 술이 취했다고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거나 하진 않더군요.] [당신에게 숨길 비밀이란게 뭐지?] [지금 당신이 데이트하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라든지 아니면 호감이 가는 미래의 애인?] [난 당신이 만나러 가는 남자쪽에 더 흥미가 있어. 대체 그 치는 누구야?]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예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당신이 이름을 알고 싶어한다고 전하겠어요. 아마 재미있어 할 거예요.] 샤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가 다시금 울렸을 때 샤리는 받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가정부가 욕실 문을 노크하면서 조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알렸다. 샤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목욕중이라고 전하세요. 만약 중요한 일이라면 전해주겠다고 용건을 물어보세요.] 그녀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조던의 노기 띤 얼굴을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로라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물론 배는 코끼리를 삼킨 것처럼 불러 있었지만. [전화 받고 정말 반가웠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미소지었다. [이안은 요즘 무척 바빠요. 게다가 전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무슨 일을 하든 침착해질 수가 없고요. 3주일째나 아기의 양말을짜고 있는데.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을 정도라니까요.] 샤리도 따라 웃었다. [그것 아니라도 벌써 많이 준비해 둔 것 같은데요?] [그렇지도 않아요. 한두 다스 정도 될까요?] 로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안의 스무명이나 되는 아주머니들이 각자 한 켤레씩 짜 주신 것 같은 기분이예요.] [스무 명의 아주머니들이라고요?] [아뇨, 정말은 네 분이지만 가끔 스무 명으로 착각하거든요. 네 분이 그이를 키워 주셨죠. 이안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요. 모두 무척 좋은 분들이죠. 다만 소유욕이 강한 게 탈이지만.] 로라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 미안해요. 샤리.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이안은 제가 너무 수다스럽다고 핀잔을 주거든요.] [전 즐겁게 듣고 있는데요.] 샤리는 로라가 더욱 좋아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전 언제나 이렇죠. 지껄이지 않으면 입이 심심해서 못 견뎌요. 옛날엔 주로 이안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는데, 요즈음에는 화제가 어느새 아기로 바뀌었더라고요. 남자분들은 아기 얘기를 꺼내면 싫어하는 눈치지만...] [그래요.] 샤리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동의했다. [이안이 아기에 대해서 얘기해 줬어요. 정말 안 됐어요.] 로라는 눈에 따뜻한 빛을 띠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벌써 옛날 일인걸요?] 샤리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조던 씨와 화해하셨다고요. 어떤 부부 사이에도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글쎄요. 다만 조던과 저는..] 샤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침 레스토랑으로 들어와 테이블로 안내되고 있는 커플에 못박혀 버린 것이다. 로라는 샤리의 안색이 별안간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도 샤리의 시선을 좇았다. 조던이 앤 페로즈를 위해 의자를 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읫미은 역시 들어맞았다. 앤 페로즈가 조던의 가장 최근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샤리는 의아하게 여기는 로라를 재촉해서 총총히 레스토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앤과 이야기에 열중해 있는 조던은 두 사람이 나가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샤리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조던의 처사에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은 건 처음이다. [샤리, 괜찮겠어요?] 로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안해요. 사실 지금은 조던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몹시 바쁜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떻게든 이 자리를 얼버무리려고 했다. 로라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의 줄로 샤리를 끌고 가 한 대의 차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자, 우리 집에 가서 점심이나 먹어요. 그야 당신한테 식욕이 있어야겠지만..] [고마워요. 로라 하지만 별로 생각이 없어요.]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앤 페로즈의 허리를 감싸던 조던의 손이 눈꺼풀 속에 아로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로라의 집 거실은 뜰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여서 도무지 런던의 한복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샤리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커피 부탁해.] 로라가 일꾼에게 일렀다. [정말 아무것도 안 드실래요, 샤리?] [네.] [그럼 커피만.] 일꾼에게 다시 지시한 로라는 둘만이 남자 샤리의 곁에 와 앉으며 말했다. [왜 레스토랑에서 도망치듯 나왔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줄수 없겠어요?] 샤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할만한 얘기가 없어요.] [자기 남편과 만나고 싶지 않다든지 말하고 싶지 않아도 하는 건 두 사람 사이가 원만치 못하다는 거군요.] 로라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 여자는 누구죠, 샤리?] [간호사예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호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시중 들 상대를 조던으로 바꾼 것 같아요... 그 여자는 시중 들 상대를 조던으로 바꾼 거예요.] 샤리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을 아니잖아요?] [달리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죠?]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조던 씨에게 확실한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로라는 부드럽게 제안했다. 샤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두 사람의 일은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늘 현장을 보고 확인한 셈이죠.] [그랬었군요...] 일꾼이 쟁반을 들고 왔다. [당신은 식사를 하는 게 좋겠어요. 기운을 잃으면 안 되니까.] 샤리는 이 새로운 친구에게 권했다. [그렇군요. 샌드위치라도 먹을까요?] [그럼 두 분은 진짜로 화해한 것이 아니었군요?] 일꾼이 주방으로 물러가자 로라는 물었다. [그래요.] [실은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죠.] 로라는 한숨을 쉬었다. [언짢게 생각지는 마세요. 다만 예전에 만났을 때 당신한테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남편과 화해했는 데도...] 샤리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눈치도 빠르군요.] [천만에요.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라 생각해요. 아버지는 필요한 것은 스스로 노력해서 손에 넣어야 한다는 주의였죠.] 샤리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조던을 되찾으라는 건가요? 그런 뜻이라면 너무 늦었어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늦어 버렸어요.] [제게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이안이. 조던 씨는 당신한테 열중해 있다고 하는 걸요.] 샤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안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조던은 여간 바람기가 심한 남자가 아니예요. 한 상대와 절대로 오래간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안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다면 이안이 잘못 생각한 거예요. 남편에 대해서라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난 그가 좋아하는 타입도 뭐도 아니예요.] 샤리는 씁쓰레하게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남자에게 있어 정해진 타입이란 없으니까요.] [그러나 조던에게는 있어요. 키가 크고 날씬한 금발을 좋아해요. 우리의 결혼생활은 꼭 6개월밖에 계속되지 못했어요.] [당신이 나빴나요, 아니면 그 분이...] [둘 다 나빴다고 생각해요.] [커피 드세요.] 로라는 샌드위치를 집어 먹으면서 샤리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러면 조던과 당신은 서로 어떤 식으로?] 샤리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임신해 있던 사이에 조던은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커피 잔을 든 그녀의 손이 떨렸다. [어머 너무했군요.] [그런 사실을 안 순간 아기를 잃고 말았죠. 그런 후로는 그가 옆에 오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얼굴도 보기 싫었고..그래서 결혼생활을 계속한 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이로부터 떠나 버렸던 거예요.] [그분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서 집을 나와 버렸다는 말인가요?] 로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은 아기를 잃은 것이 원인이지. 조던 씨에 대한 혐오감에서 온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샤리는 씁쓸히 웃었다. [지금은 알고 있어요.] [그럼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나요?] [미쳐 버릴 정도죠. 그이가 날 탐할 때는 혼이 빠져 버릴 지경이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앤 페로즈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지 뭐예요. 어젯밤에는 그 여자 일로 곤드레가 됐었어요.] [그것 뿐인가요?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군요.] 샤리는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수롭지 않다고요?] [네, 그래요. 이안과 내가 데이트를 시작했을 무렵, 조던과 이안은 곧잘 곤드레가 돼서 야단법석을 떨곤 했었지요.] [조던이?] 샤리로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요. 내가 그와 처음 알았을 무렵,그는 언제나 취해 있었어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인걸요.] 로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분에 대해서 그다지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술을 안 드셨을 때의 그분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된 그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하겠군요. 난 어젯밤 처음으로 그이의 술취한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로라는 어깨를 의식했다. [그러나 사실이예요. 이안에게 물어보세요. 아니면 직접 조던씨에게 물어 보시든지...] 샤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던과는 다시금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또 그분에게서 떠나 버릴 작정인가요?] [언젠가는요. 난 그이의 외도를 그냥 넘기지 못하겠어요. 로라. 성격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 [나 역시 그래요.] 로라는 풀이 죽어 맞장구를 쳤다. [이안과 내가 결혼하기 전에 한 번 사이가 벌어진 적이 있거든요. 그이가 배신 한 것을 알았거든요. 이내 해결은 났지만...] 샤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정말 겉보기와는 다르군요. 미인인데다가 강철같은 의지도 갖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고맙군요.] 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와 계실 텐데. 너무 오래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어요. ] 샤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또 전화해 주시겠죠? 그리고 참, 저녁식사에 초대한 건으로 조던 씨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그분 초대에 응해 줄 테죠?] [네, 그래요. 하지만 앤 페로즈한테 정신이 없는 터라 언제 방문하게 될지 예상을 못하겠군요. 그이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버리면 만사를 잊어버리는 성미라서요.] 샤리는 쓰디쓰게 말했다. [어마, 그래도 꼭 와주셔야 해요. 그것도 가까운 날에 말이예요. 우린 너무 오래는 기다리지 못해요..] [가급적 노력해 볼께요.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당신한테 또 전화를 할께요.] 샤리는 약속을 하고 로라와 헤어졌다. 집을 향해 차를 달리면서 샤리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샤리가 알고 있는 조던은 도가 넘도록 술을 마시는 일이 없었다. 어젯밤을 제외하고 그가 곤드fp가 된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는 흔히 있는 일인 양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에 덧붙여서 조던이 앤 페로즈와 만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충격-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깊은 관계임이 틀림없다. 집으로 돌아온 샤리는 주차장에 조던의 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오후에도 앤 페로즈와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아마 그녀가 병원 근무에 묶인 모양이지. 참으로 안됐군. 샤리는 심술궂은 쾌감을 맛보았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조던이 서재에서 나왔다. 빛이 바랜 진즈와 체크 무늬의 오픈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검게 탄 얼굴이 약간 창백하고 코에서 입 언저리에 걸쳐 주름살이 새겨져 있지만, 그에게는 사내다운 매력이 있어싸. 샤리는 무관심을 가장하며 그를 외면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거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냉랭하게 물었다. 조던은 험상궂은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뒤를 따랐다.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거지?] 샤리는 도전하듯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에겐 그것으로 족해요.] 조던은 미안한 듯 나직하게 말했다. [어젯밤은 내가 나빴어. 사과하겠어.] [어젯밤의 일 말인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예요.] 조던은 그녀를 붙잡고 뒤돌아서게 했다. [얼버무리지 말고 대답해.] [답은 이미 했어요.] [듣지 못했어.] 그는 샤리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당신은 단 한번인들 스스로 나에게 무엇이건 준 적이 있어? 나는 내가 필요했던 것은 모조리 당신에게서 빼앗을 수 밖에 없었어. 만약 지금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대답하게 만들 수밖에 없겠지. 그는 사나운 어투로 다그쳤다. [어련하시겠어요!] 샤리는 그를 쏘아 보았다. [내게 도전할 셈인가?] 그는 갑자기 조용해져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전이라고요? 그 일이 도전이랄 만큼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알았어!] 조던은 샤리의 팔목을 잡고 그녀를 방에서 끌어냈다. [벗으라고] 침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는 명령했다. [싫어요.] 샤리는 분연히 대답했다. 조던은 그녀의 옷깃을 자고 힘껏 잡아당겼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며 옷의 앞자락이 찢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벗겠어. 아니면 내가 벗겨 줄까?] [싫어요. 아버지께서...] 샤리는 떨고 있었다. [아버님은 진정제를 드시고 지금 방에서 쉬고 계셔. 어젯밤엔 아버님도 잠을 설치셨던 모양이야.] 그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 이유는 아실 테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따위는 낸버려 뒀어도 좋았어. 상관해 달라고 부탁한 기억은 없는데?] [아침에 고용인에게 발견되는 편이 좋았다는 건가요?] 샤리는 매섭게 반박했다.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야.] 그는 나른하게 말했다. 샤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게 습관화 됐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자, 당신 스스로 옷을 벗을 텐가, 아니면 내가 벗겨줘야 하는 건가? 어느쪽이야?] [어느 쪽도 싫어요.] 샤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벗겨 주지.] 조던은 사납게 저항하는 샤리의 주먹을 무시한 채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당신은 오늘 아침 일부러 욕실에 들어갔더군. 내 전화를 안 받기 위해서 a라이야.] [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요?] 샤리는 내뱉듯이 말했다. 조던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당신 애인의 이름이 알고 싶기 때문이지. 샤리. 당신이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사람!] [상관하지 말아요.] 샤리는 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는 남편과 아내가 항상 평등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당신과의 생활에선 전혀 아니예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더이상 속이지 말아요, 조던. 지금도 내가 열여덟의 순진한 바보로 보이나요? 아니면 아직까지도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만 따르고 당신이 보여주는 것만 보는 멍청한 아내로 보여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 그는 화를 벌컥 냈다. [이제야 알겠어요!] 샤리는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 찼다. [이런...] 조던은 비틀거리며 샤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 여우같은...] 그는 미친 듯이 외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샤리는 욕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그고 문에 기대었다. [샤리, 샤리. 어서 문 열어! 당신에게 손대지 않을게.] [어제도 그랬잖아요.] 문 너머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제발 나와 줘. 할 얘기가 있어. 그것뿐이야.] [이미 때가 늦었어요. 우리의 대화란 언제나 같은 형태로 끝나버리고 말잖아요. 육체적 만족만으로 결혼생활이 행복할 순 없어요.] [당신에게 있어 우리의 결혼은 육체적 만족뿐이었다는 건가? 정말 그뿐이었단 말이야?] [새삼 알고 있는 얘기를 또 꺼내고 싶지 않아요.] 샤리는 쓸쓸히 말했다. 조던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잠시 후 다시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솔직한 심정이라면 아무리 둘이서 얘기를 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군. 당신 말대롱.] [겨우 아셨군요.] [마침내..그리고 완전히 알았어. 난 이제 거실로 내려가겠어. 그러니 어서 나와. 그런데서 얼어죽기 전에 말야.]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고 문밖은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샤리는 욕실에서 나왔다. 침실은 텅 비어 있었고 조던의 격졍의 흔적인 찢겨진 옷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눈물이 샤리의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두 사람 사이의 그나마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조차도 모두 타버린 것이다- 조던이 말했듯이 마침내 그리고 완전히. 조던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두 번 다시 샤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후 2주일 동안에 샤리는 로라와 두 번 점심을 같이 했지만 조던이 사업상 출장을 갔기 때문에 저녁 식사 초대의 건은 보류되고 있었다. 이윽고 조던은 출장에서 돌아왔지만 예전보다 더욱 냉랭하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퇴원 후 5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좀처럼 기억을 회복하는 기미가 없었다. 병원에 열심히 다녔고 사무실에도 한두 번 나가 보았지만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밖에서 돌아온 조던은 뜰에 있는 샤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때마침 볼일이 있어 사무실에 나가 부재중이었다. [오늘 밤 무슨 스케줄이 있소?] 조던이 물었다. 그는 몇 주일간의 이중 생활의 피로 탓인지 귀밑머리에 새치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얼굴도 초췌해졌다. 그러나 샤리로서는 동정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녀도 역시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 샤리는 혼자 자는 것이 견디기 어렵도록 허전하고 외로웠다. 밤마다 조던의 침실로 가서 안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얕은 잠으로 인해 몸이 몹시 나른했다. [왜요?] 샤리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이안 스미드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왔어. 꼭 오늘 밤엔 저녁초대에 와 달라는 거야. 로라의 해산이 임박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이 파티를 실현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샤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동감이야.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 연극을 하는 것과 타인 앞에서 쇼를 하는 것과는 차웡이 틀리니까 말이야.] 조던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예요. 로라의 몸이 걱정스러웠던 거예요. 게다가 그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할 필요는 없어요. 로라는 우리의 결혼이 위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이안에게도 말했을 거예요.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는 모양이니까.] [로라에게 모두 말했다고?]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로라가 벌써 눈치채고 있었으니까요. 로라는 내 가까운 친구거든요.] [매기에 비하면 로라 쪽이 훨씬 낫다는 건 인정하고 있지.] [그 정도로는 로라를 칭찬한 것이 못 돼요. 당신 생각으로는 변절자인 유다 역시 매기에 비하면 훨씬 조은 사람일 테니까.] 조던의 입 언저리가 일그러졌다. [매기를 유다에게 비한다는 건 좀 야릇한 걸.] 샤리는 날카롭게 조던을 쏘아보았다. [무슨 뜻이죠?] 조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항상 질문을 얼버무려서 대답을 피하려는 사람은 누구죠?] 샤리는 비아냥거렸다. 조던은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대답을 시키면 될 거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 한 똑같은 방법으로 말이야.] 그가 거의 완력에 가까운 방법으로 자기의 몸을 빼앗았던 오후의 일을 상기하고 샤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를 당신과 똑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이안과 로라에게는 몇 시에 가면 되는 거죠?] [일곱 시 반이야.] [그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게 좋겠군요.] 샤리는 조던의 시선을 등뒤에 느끼면서 천천히 뜰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던에게 자신을 최고로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꼼꼼이 화장을 했다. 앤 페로즈는 확실히 미인이긴 했지만 샤리 또한 그녀 못지않은 미인이었다. 앤에게 조던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초라한 모습은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던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해 보이고 싶었다. 짙은 블루의 드레스는 샤리의 허리를 낙낙하게 감싸며 무릎 아래를 슬며시 드러내고 있었다. 가느다란 벨트가 허리를 죄어 보기좋게 솟은 가슴을 돋보이게 했다. 칠흑같은 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엷은 화장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차갑고도 성숙한 분위기. 그녀의 모습을 보자 조던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지만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애프터 셰이빙 로션의 관능적인 향내가 좁은 차 안에 감돌았다. 그가 피우고 있는 시가의 향기와 어울려서 샤리의 감각을 자극했다. 샤리는 언제나 이 시가의 향기가 좋았다.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좀 달랐다. 그 냄새 때문에 기분이 역해져 왔다. [시가를 꺼주지 않겠어요?] 그는 놀라는 듯 했지만 이내 시가를 비벼 꺼버렸다. [미안해. 기분을 상하게 할 줄은 몰랐어.] [기분을 상한 게 아니예요. 딴 때라면 모르지만...] 샤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차 안이 너무 더워요.] 그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조던은 걱정스러운 듯 샤리의 모습을 살폈다. [창을 열까?] [아니 괜찮아요. 곧 나아질 테죠.] 샤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차의 속도를 크게 줄였다.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뇨!] 샤리는 외쳤다. [그냥 가요. 이안과 로라가 기다리고 있어요.] 만약 집으로 돌아간다면 조던은 필시 앤 페로즈를 만나러 가버릴 것이다. 스미드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영원히 계속될 듯이 길었다. 겨우 도착 했을 때 샤리는 차에서 내려 반복해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팔을 잡아주려고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로 다가간 조던은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후회하듯이 말했다. [역시 되돌아갈 걸 그랬나 봐.] 샤리는 등을 펴고 턱을 당기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 그는 벨을 누르며 계속 중얼거렸다. 문을 연 것은 로라 자신이었다. [샤리 어서 와요!] 그녀는 샤리를 얼싸안았다. [로드씨도 환영해요.] 약간 수줍은 듯이 그녀는 인사를 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로라의 볼에 키스를 했다. [곧 소식이 있겠군요.] 그는 로라의 볼룩한 배를 놀려댔다. [앞으로 이틀 남았어요. ..예정으로는요. 그러나 실제로는 언제 낳게 될 지 몰라요.] 로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 거실로 가시죠. 로드 씨. 이안이 위스키를 대접하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권하면 사양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염려 마십시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샤리와 저는 그녀의 코트를 이층에 놓고 내려오겠어요.] 로라의 침실로 들어서자 샤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코트를 이층에 갖다 놓는데 두 사람이나 필요해요?] [둘이서만 있고 싶어서였어요. 로드 씨와의 사이는 어떻게 됐어요?] [악화 일로예요.] [안 됐군요. 그 여자와는 아직도 만나고 있나요?] [네, 어서 식사나 들게 해 주세요. 시장해서 쓰러질 지경이예요.] 샤리는 조던과 앤의 일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로라의 팔을 끌며 재촉했다. 디저트를 드는 도중에 샤리는 정말로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졌다. 오한이 파도처럼 엄습해 와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 샤리?] 조던은 얼른 일어서며 샤리를 소파로 데려갔다. [미안해요. 낮에 먹은 조개 탓인가 봐요.] 그녀는 로라와 이안을 올려다보며 사과했다. [왜 일찍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소? 의사를 부릅시다.] 조던은 걱정스러운 듯 허둥거렸다. [괜찮아요.]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로라는 샤리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튼 의사에게 보여야겠어. 만약을 위해서 말이야.] 조던은 주장했다. [나도 로드 씨의 의견에 찬성해. 어패류의 중독이라면 큰일이니까.] 이안도 한마디 거들었다. [샤리에게 필요한 건 누워서 안정하는 일이예요.] 로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라의 말대로예요. 잠시 누워 있으면 곧 나을 거예요.] 샤리는 간청하듯 로라를 쳐다보았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다. [누워 있기로 결정됐어요.] 로라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요.] 침실은 쾌적하고 어두웠다. 샤리는 침대 위에 누우면서 가냘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소란을 떨어 미안해요.] [미안할 것 하나도 없어요.] 로라는 샤리를 안심시키고는 조던을 향해 말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세요. 샤리가 안정되면 저도 곧 내려갈 테니까요.] [샤리, 기분이 어때?] 그는 샤리에게 물었다. [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샤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조던이 아쉬운 듯한 얼굴로 나가는 것을 보고 휴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자, 솔직히 말해봐요.]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으며 로라가 물었다. [아주 괴로워요.] 샤리는 창백한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 임신은 아니예요? 하여간 진한 차와 비스켓을 먹으면 안정이 될 거예요.] 로라는 일어났다. 샤리는 흠칫해서 로라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로라! 당신은 정말 못말리는 사람이예요. 나도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어요.] [조던은 아직 모르고 있는 거죠?] [그인 모르고 있어요.]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조금전까지는 몰랐어요.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임신이 아닐까 생각한 거예요. 로라, 난 어떡하면 좋지요?] 샤리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로라는 조용히 샤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충격이 워낙 커서...] [아기를 낳고 싶지 않나요?] [천만에요. 아기는 낳고 싶어요.] [그럼 뭐가 문제죠?] [아기 아빠가 문제라니까요.] [아빤 로드 씨잖아요.] [그야 물론이죠. 난 아직까지 그이 외의 남자는 모르니까요.] [유감스럽다는 듯이 들리는데요.]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면 이렇게 쉽게 두 번 씩이나 조던 때문에 괴로워하진 않을 거예요. 그랬다면 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실수했다고 생각해요?] [아뇨.] 샤리는 또 한숨을 쉬었다. [내가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조던의 아기를 갖고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워요. 그러나 임신을 계기로 그를 속박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은 로드 씨가 당신에게 구속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나요?] 샤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아버지가 회복하는 대로 여태까지의 독신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해요.] [정말?] [네, 정말이예요.] [그래요?] 로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차와 비스켓을 가지고 올게요.] [로라!] 샤리는 로라를 불러 세웠다. [조던에겐 비밀이예요.] [물론이죠. 곧 돌아올께요.] 로라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조던의 아기를 임신한 것이다! 샤리는 행복한 마음에 큰 소리를 지르고 외치고 싶었다. 이번에는 꼭 무사히 아기를 낳을 것이다. 조던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의사의 진단을 기다릴 것도 없이 샤리는 자신의 임신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진찰을 해주었던 폴 앤더슨 의사의 친절한 손길을 생각하고 역시 진찰을 받으리라고 결심했다. [자, 어서.] 로라가 약속한 차와 비스켓을 갖다 주었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서 로드 씨에게 걱정말라고 안심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샤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차를 마시며 천천히 비스켓을 씹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간단히 임신이 된단 말인가? 너무도 간단히! 조던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나의 몸속에서 새로이 자라는 우리의 아기에 대해 둘이서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 그fjk 그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희망이었다. 조던은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그다지 달가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기가 태어난 후의 생활에 대해서 상의하는 일조차도 피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로라가 조용히 침실로 되돌아왔다. 옷장 속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샤리는 자세를 고쳐 다리를 움직였다. 메스꺼움도 현기증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뭘 하고 있어요?] 그녀는 호기심에서 물어 보았다.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는지 점검해 보는 거예요. 살펴보길 잘했지. 잠옷을 하나밖에 안 넣었지 뭐예요.] 로라는 두 개를 더 챙겨 넣었다. [자, 이거면 됐고. 가방 준비도 오케이고..참 나가기 전에 식당을 치울 틈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요리를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어서 일꾼에게는 오늘 밤 휴가를 줬죠. 내일 그애가 왔을 때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식당을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러나 시간이 없을 것 같군요.] [둘이서 같이 치우면 되잖아요. 난 이제 괜찮아요.] 로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긴 둘이서 치우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자 로라는 갑자기 헐떡이듯 숨을 가쁘게 쉬며 불록한 배에 손을 댔다. [아야, 지금건 너무 심했어.] [지금 것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샤리가 다그쳐 물었다. [벌써 두 시간 전부터 진통이 시작되고 있어요.] 로라가 행복한 듯이 말했다. [정말? 병원에 알렸어요?] [네, 물론.] [이안에게도?] 로라가 킥킥 웃었다. [아니, 아직. 그는 겁만 먹을 뿐일테니까요.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걸 어떻게 dkff아요?] 샤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일어섰다.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거예요.] [그럴까요. 아..] 로라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당신 말대로예요.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총총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던은 이안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샤리의 곁으로 와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신 괜찮아?] [지금 급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로라예요.] 샤리는 간단하게 사정을 알렸다. [이안, 어서 차를 대기시키세요. 그리고 당신은 침실에 올라가서 로라의 가방을 가져와요.] 이안은 새파랗게 질려서 헐떡이듯 말했다. [저, 그러니까 로라, 당신은...] [글세 그렇다니까요. 빨리 차를 대기시켜요.] 샤리는 초조했다. [내가 운전하지. 이안은 지금 운전할 상태가 아니야.] 조던이 자청하고 나섰다. [좋은 생각이예요. 어서 서둘러요.] 샤리는 조던의 제의에 찬성했다. [당신은 어떡할 거야?] [로라가 식당을 치워주길 원해요. 제가 약속하지 않는 한 그녀는 병원에 안 가려고 할 거예요.] [당신을 혼자 놔두고 갈 순 없어.] 조던은 샤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예요.] 샤리는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으며 재촉했다. [로라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줘요.] 샤리는 겨우 모두를 집에서 내보냈다. 조던이 운전하고 이안은 로라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곧 알려 줘야 해요.] 샤리는 부탁했다. [네, 당신도 무리하면 안 돼요.] 로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샤리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주방과 식당을 치우기 전에 순서대로 접시부터 씻었다. 바삐 일하고 있으면 로라와 태어날 아기의 일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부터 8개월 후에는 나도 로라와 똑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조던은 곁에 없을 것이다. 그가 지금 로라를 병원으로 데려가면서도 멀지 않아 자신의 아기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조던은 한 시간 남짓해서 돌아왔다. 거실에 있던 샤리에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고를 했다. [아직 몇 시간 더 걸릴 것 같더군.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이안이 전화해 주기로 했어. 자, 집으로 돌아갑시다. 당신도 매우 피곤한 모습이야.] 샤리는 얼굴을 붉혔다. [기분은 좋은걸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집으로 가자고. 침대에 누워서 뭔가 따뜻한 것을 마시는 게 좋겠어.] [당신도 같이 가요.] [나도?] 그는 뜻밖이라는 듯 반문하다가 얼굴을 돌렸다. [아니 그건 안 돼.] 따스한 차 안에 앉아 샤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늘 밤은 그가 같이 있어 주기를 바랬다. 두 사람이 귀가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쉬고 있었다. 하품을 하면서 샤리도 자기의 침실로 향했다. 조던은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샤리가 침대에 눕자 문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놀랍게도 쟁반을 받쳐 든 조던이 들어왔다. 샤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코코아야.]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잔을 받아들면서 샤리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가 오늘밤 자기의 침실에 나타나리라고는 예상조차 안 했기 때문에 그의 등장은 샤리의 마음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그건 뭐죠?] 그가 내민 정제를 보고 샤리는 물었다. [샤리,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로라의 출산을 기다린다는 건 좋지 않아. 이건 수면제야.] [싫어요. 먹지 않을래요.] [해가 되는 약이 아니야. 당신 아버지가 드는 수면제니까 안심해도 돼.] [어떤 약이든 약은 싫어요.] 샤리는 완강히 거절했다. [나 역시 약은 질색이야. 하지만 오늘밤만큼은 충분히 잠을 자야 해. 당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야.] 조던은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을 안 먹어도 잠이 올 것 같아요...조던?] 샤리는 문득 침대의 한쪽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등에 조던의 체온이 느껴졌다. [불빛이 방해로군.] 그는 샤리의 귓볼을 살며시 물면서 속삭였다. [조던..] 샤리는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거절하지 말아 줘. 샤리. 오늘밤만큼은 당신이 꼭 필요해.]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를 천천히 끌어 당기며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녹이며 혀로 그의 혀를 가벼게 끌어당겼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욕정에 휩싸이며 조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샤리..나를 되살아나게 해줘ㅓ.] 조던은 허리르 안고 있던 손을 움직여 단숨에 옷을 걷으며 자신도 옷을 벗어 던졌다.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연거푸 거친 신음 소리를 토하며 억누르드 샤리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아들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원을 그리듯이 엄지 손가락으로 가슴을 애무하며 두 개의 젖가슴을 번갈아 가며 가볍게 키스하듯 깨물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전신에다 내것이라는 낙인을 찍듯 거칠게 애무를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이 저리는 듯한 애무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미처 호흡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그에게 다시 유두가 깨물리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신경 끝까지 저려오는 듯한 짜릿한 충격에 가는 몸을 비틀어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자진해서 거친 리듬에 자신의 몸을 맞추며 그에게 감미로운 자극을 던졌다. 몸을 활처럼 휘며 고통스럽게 자신을 맞추는 샤리를 보며 그도 곧 절망적일 정도의 깊은 욕망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격하게 자제되고 있던 욕망이 불규칙하게 빠져 나오며 세찬 욕구에 시달렸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엉덩이를 들어 자신의 터질듯한 남성을 그녀 깊숙히 가라앉히듯 녹이기 시작하며 자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거칠고 빠른 리듬에 그녀를 맞추기 시작했다.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 두 사람은 자아를 상실한 채 서로의 몸이 착 달라붙은 채로 거친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한 리듬이 더욱 세차고 거칠게 빨라지면서 한순간 가는 신음 소리가 외마디 비명소리로 변하며 두 사람은 캄캄하고 완벽한 어둠 속으로 서로의 몸을 던졌다. 조던은 잠속에 빠져 있는 샤리의 머리를 땀에 젖은 자신의 가슴 위에 얹으며 자신도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어떤 다른 약들도 필요없이... 이튿날 아침 샤리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침실에 없었다. 그러나 샤리에게는 지난 밤 그와 깊이 맺어졌다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몸 여기 저기에 느껴지는 나른한 기운 때문에 이불 속을 파고 들면서도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언제나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임신했닫는 사실을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느닷업이 조던이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손에는 샤리를 위한 아침식사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로라가 아들의 대모를 위해서 침대까지 식사를 갖다주라고 하더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라가 사내아이를 낳았나요?] 샤리는 벌떡 몸을 일으켜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안도.] 조던 역시 밝은 어조로 농담을 던졌다. [둘 다 모두 건강하대요?] [로라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는군. 체중은 3.5킬로. 이름은 안소니 마이켈.] [로라 아버님의 이름을 땄군요.] [이안의 부친 이름도 땄어.] [당신은 내 아침을 들고 하루종일 거기 서 있을 생각이예요?] 샤리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조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쟁반을 샤리의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맛있어 보여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조던을 쳐다보았다. [내가 진짜로 안소니의 대모가 되는 건가요?] [응, 그리고 내가 대부가 되기로 했지.] 조던은 침대에 앉았다. 빛이 바랜 진즈와 착 달라붙은 푸른 셔츠를 입은 그의 못브은 남성적인 매력에 넘쳐 있었다. 샤리는 토스에 버터를 바르고 차를 따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세례는 언제 하게 되죠?] [이안과 로라는 그 일에 대해선 잘 모르는 모양이야. 아무말 없었으니까. 보통 언제쯤이지?] [생후 6개월쯤으로 생각돼요.] [그럼 아직 멀었군.] [그러나 6개월 후에 우리는 같이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샤리는 문득 생각이 났다. [무슨 얘기지? 어제로 당신과 난 다시 화해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럼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욕구의 만족인가?] 조던은 샤리의 곁에서 떨어져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샤리는 그의 넓은 등과 늠름한 어깨를 바라보면서 착잡하면서도 한편으론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당신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었나요?] 그는 홱 몸을 돌리자 차가운 잿빛 눈으로 그녀를 쏘듯이 보며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아주...즐거웠어요.] 그녀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런 건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는 것이야.]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그의 격한 분노가 화끈 느껴졌다. [하지만 저도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멋대로 해.] 조던을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샤리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아버지는 마침 아침식사를 끝내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냐? 조던이 오늘은 회사를 쉬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는지 조금 전에 나가더구나.] 샤리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쉰다는 것도. 조던이 사무실에 나갔다는 것도. [그이는 항상 바쁘잖아요.] 그녀는 적당히 대답한 다음 아버지를 놀렸다. [어젯밤엔 어딜 가셨었어요?] [조던이 네게 말하지 않던?] 아버지는 좀 어색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아뇨, 아버지. 가르쳐 주세요. 뭔지 아주 좋은 일이 있었던 소년처럼 기쁜 표정이신데요.] [내가 아무래도 사랑을 하게 된 것 같구나, 샤리.] 아버지는 면구스러운 듯 얼굴을 더욱 붉히면서 말했다. [누군데요, 상댄?] [네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앤, 앤 페로즈를 사랑하게 됐어.] [앤?] 샤리는 안색이 변했다. [그걸..그걸..전 전혀 모르고 있었군요.] 이 무슨 얄궂은 일인가. 아버지는 조던이 은밀히 만나고있는 여성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니! 이렇게 되면 아버지나 나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조던은 적어도 아버지에 대해서만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하기야 결혼따위를 생각하기에는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말이야...] 아버지는 멋적게 말했다. [아버지 연세가 벌써 쉰 하나잖아요.] 샤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흔 여섯이라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앤을 새 엄마로 맞이한다면 넌 어떻겠니?]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앤의 진심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참 그렇구나. 그런데 네 친구에게 아기가 생겼다지?] 아버지는 화제를 돌렸다. [네, 병원에 전화해서 오늘 면회가 가능한지 알아볼 참이었어요.] 샤리는 조던과 같이 가서 아기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볼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이 논의의 일이 되어 버렸다. [잠깐 전화좀 걸고 오겠어요.] [병원에 가는 건 별로 찬성할 수 없는데.] 아버지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왜요?] [실은...네가 5년 전에 아기를 잃었다는 사실을 조던에게서 들었다.] [그러셨어요?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예요. 아버지. 그리고 면회를 안 가면 로라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도 그렇군.] 아버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다음주 샤리는 병원으로 몇 차례 로라를 찾아갔고 안소니 마이켈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조던도 병원에 찾아갔었던 듯, 백장미의 꽃다발과 안소니에게 준 큼직한 장난감 곰이 있었다. [이 곰, 안소니보다 더 큰걸요.]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 로라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기는 이층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 [안소니가 금방 더 커질 걸요.] 샤리는 웃었다. 로라가 퇴원한 후 이틀째, 안소니가 태어난 지 벌써 열흘이 된다. 그동안 샤리는 거의 조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이 없었다. 사업, 출장 또는 향락을 위해서인지.. 어떻든 그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 아기도 순조롭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군요.] 로라의 말에 샤리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조던은 아직도 모르나요?] [네.] 샤리는 얼굴을 돌렸다. [의사한테 진찰은 받았어요?] [오늘 오후에 병원에 갈 거예요.] [몸조리를 잘해야 해요.] 로라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봐야겠네요. 약속 시간까지 20분밖에 안 남았어요.] [잘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어요. 나중에 또 전화해줘요.] 샤리는 꼭 전화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로라의 볼에 키스를 했다. 근래 며칠 동안에 샤리는 로라와 더욱 친밀해져서 지금은 거의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샤리는 진찰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불안해했다. 임신한 사실에는 확신이 있었지만 어떤 이상이 있다고 한다며 어떡할까? [로드 부인. 진찰실로 들어오십시오.] 폴 앤더슨 의사가 샤리를 불러들였다. [다시 뵙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요.] 의사는 미소를띠며 말했다. 샤리는 갑자기 손바닥이 뜨거워져 끈적거림을 느끼면서 핸드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칠 듯이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아 있었다. [선생님...제게 또 아기가 생길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샤리는 신경질 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럼요. 참, 부군께서는 같이 오시지 않았나요?] [네, 좀 일이 있어서요.] [분주한 분이었죠. 그럼 진찰을 시작해 볼까요. 그래야만 확실한 것을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요.] 의사는 더 이상 친절할 수는 없을만큼 정중하게 정성껏 진찰을 해주었지만 샤리에게는 역시 진찰이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의사가 손을 씻고 있는 동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시를 고쳤다. [축하합니다, 임신이 틀림없습니다.] 의사는 미소를 띠며 알려주었다. 샤리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5,6주쯤 된 것 같습니다.] 의사는 차트에 기입을 하면서 말했다. [물론 전번 임신 때와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만..] 샤리는 불안해진 마음에 눈을 찌푸렸다. [문제라니요?] [그렇습니다. 지난 번과 똑같은 세심한 주의를 해주셔야만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주의를 해야 하는 건 말입니다.] [특별히 주의하셔야만 된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난 번엔 세심한 주의를 안 했다는 뜻이군요.] 샤리는 괴로웠던 과거가 생각났다. [그렇습니다. 특히 부인처럼 예민한 분은 흥분하거나 심하게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의사는 엄숙하게 명령했다. 샤리는 더욱더 당황했다. [예민하다고 말씀을 사셨는데..제가 그런 체질인가요?] [극단적으로 예민하십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없을까요?] 샤리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간청했다. [부인께서는 9개월 동안의 임신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체질이십니다. 세시한 주의사항은 로드씨께서 가르쳐 ...] [조던이요?] 샤리는 격해진 어조로 의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사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로드씨께서죠. 또다시 부인의 침대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니 즐거울 까닭은 없으시겠지만.] 의사는 동정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는 다르겠지요. 신혼이 아니니까요.] 샤리의 얼굴은 심하게 창백해졌다. 의사는 점점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했다. [5년 전에 선생님께서 조던에게 침실을 따로 쓰라고 충고하셨었나요?] [그렇게 딱 잘라 말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정상적인 관게를 계속할 수 없는데 침실을 같이 쓴다는 건 로드씨로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랬었군요.] 샤리는 숨을 헐떡거렸다. 지금까지 조던은 나의 임신을 두려워하고 있다고만 생각해 왔었는데 그는 오직 나와 태어날 아기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리는 조던에 대해서 가졌던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샤리는 자기가 진찰실의 긴 의자에 누워 있고 폴 앤더슨 의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제야 비로소 5년 전의 일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왜 조던은 사실을 매일밤 나를 외면했던 까닭을 숨기고 있었을까? [부인은 전혀 모르고 계셨던가요?] 의사는 탄식하면서 물었다. [네..저는 전혀 몰랐었어요.] 샤리의 목소리는 떨렸다. [로드 씨한테서 분명히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남편과는 아기를 잃은 직후부터 별거하고 있었어요.] 샤리는 긴 의자에서 일어나며 더듬더듬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랬었군요.] 의사는 약간 놀란 듯 했으나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이번에 생긴 아기는...] [물론 남편의 아기지요. 한때 화해를 했을 때 생겼어요. 그건 어떻든 저는 이번에는 꼭 무사히 아기를 낳고 싶어요.]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로드 부인.] 의사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무사히 우리 아기를 낳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어떤 일이라도 지키겠어요.] 샤리는 열심히 간청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부인께 가장 좋은 방법은 임신기간 중 계속 자리에 누워 계시는 일입니다. 자택이든 병원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계속 누워 있으라고요?] 샤리는 놀라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유산의 위허은 없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어요.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샤리는 마음을 굳혔다. [빠를수록 좋습니다만. 그러나 혼자서 결정하셔도 괜찮을까요? 우선 로드씨와 의논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뇨, 상관없어요. 한때 우리는 화해했었습니다만 지금은 다시 깨져버리고 말았어요.] [알겠습니다.] 의사는 깊은 사정도 모르는 채로 승낙했다. [이 병원이라도 좋으시다면 제가 주선을 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겠어요.] 샤리는 일어났다. [나중에 전화로 연락드리겠어요. 그러나 이 일은 누구한테도 말씀하지 마세요.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로드 씨께도 비밀로 하라는 말씀이시죠?] 의사는 샤리의 심중을 알아챈 듯 했다. [네. 남편에겐 제일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샤리는 망연해진 상태로 진찰실을 나왔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매기를 생각했다. 얼마 후 샤리는 매기의 아파트 앞에 서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네가 왠 일이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지?] 너무도 뜻밖인 샤리의 방문에 매기는 적잖이 놀란 듯 했다. 샤리는 그 자리에서 그만 왈칵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녀는 가냘픈 체구를 떨면서 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 야만인한테 또 수모를 당했니?] 매기는 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티슈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야만인이라니, 조던 말이야?] 샤리는 매기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난..] 매기는 뭔가 말하려다가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열쇠로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왠 남자가 들어왔다. 티셔츠에 청바지의 , 다듬어지지 않은 차림에 봉두난발의 젊은 남자였다. [왜?] 매기가 나무라듯 물었다. [노트를 잃어버렸어.] 사나이는 방구석에 있는 책상 위에서 노트를 집어들자 샤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친구인 것 같은데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 매기에게 재촉을 했다. 이 남자는 매기의 남자친구일 것이라고 샤리는 짐작했다. 샤리가 생각했던 그런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매력이 있었다. 매기는 어째서 소개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일까? 이러한 결례는 매기답지가 않다. 샤리는 매기에게 의미있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매기는 그냥 입을 다문채 여 T다. [저는 샤리 로드예요.] 그녀는 할 수 없이 직접 자기의 이름을 밝혔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그 샤리 로드란 말인가요?] 샤리는 움찔했다. [그라뇨, 무슨 뜻이죠?] [조던 로드의 부인이며 데비드 데일의 따님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로군요.] 샤리는 끄덕였다. [전에 어디서 만났었나요. 미스터..?] [벤이야!] 매기가 재빨리 이름을 댔다. [염려 마, 달링. 신경쓸 것 없어. 난 이만 나갈 테니까.] 남자는 히죽 웃어보였다. [그럼 천천히 노시다 가시죠. 로드 부인.] 샤리를 향해 그는 인사를 했다. [우리가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아, 그렇지. 조던에 대해서였지.] 남자가 나가자 매기는 성급히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매기.] 샤리는 매기를 제지했다. [너의 남자친구가 벤이라고 했지. 설마 그 벤 더스튼은 아닐 테지.] [샤리...] [그럼 역시...] 샤리는 어쩔 바를 모르는 실망감에 사로 잡혔다. [아버지의 일을 기사로 쓴 그 벤 더스튼이란 말이지. 너였었구나. 누가 아버지의 비밀을 폭로했을가 하고 늘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 네가 그 장본인이었어. 왜 그랬지, 매기? 왜 그런 짓을 했어?] 샤리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매기를 책망했다. 그러나 매기는 도리어 화를 냈다. 눈을 이글이글 빛내며 내뱉듯이 말했다. [벤을 잡아두기 위해서 그랬어.] [그러나 두 사람 관계에 있어 망설이고 있는 쪽은 너라고 말했잖아.] [거짓말을 했던 거야.] [그럼 벤을 잡아 두기 위해 우리의 우정을 배반하고 아버지의 비밀을 팔아먹었다 그 말이니?] [그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더 심한 짓이라도 서슴치 않고 했을 거야.] 매기는 격앙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친구임에는 틀림이 없어. 그러나 문제가 남자에 관계되는 한 친구 따위가 문제야? 조던에게 물어보라고. 내가 그를 호텔로 유인했을 때의 일을 아주 재미있게 말해 줄 테니까. ] 매기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샤리는 새파랗게 질렸다. [뭐라고? 너와 조던이?] [아무 일도 없었어.] 매기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나와 조던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 물론 유혹은 했지만..] [조던이 거절했니?] [그래.] 매기는 성난 듯이 소리쳤다. [정말 건방진 작자야. 너한테 버림받은 후에도 내 유혹이 먹혀 들지 않았으니까. 정말 건방져. 그래도 역시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사실이야.] 매기는 원망하는 마음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던이 왜 너를 싫어했고 가까이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이제 비로소 알 것 같구나.] 샤리는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이번 일로 너도 나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됐을 거야.] 매기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샤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너는 행실이 나쁜 여자야.] [반대로 넌 품행이 방정하다는 얘기구나. 그렇지만 소중한 조던을 독점하지는 못했잖아, 그렇지?] 매기는 코웃음을 쳤다. [너한텐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 내뱉듯이 말을 던지고는 샤리는 매기의 아파트에서 뛰쳐나왔다. 예민한 체질이기 때문에 임신 중에는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을 절대 피하도록 하라고 조금 전에 주의를 받았는데..그런데 매기의 남자친구가 실은 벤 더스튼 기자였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그 위에 매기가 줄곧 조던을 유혹해 왔었다니! 믿을 수 없는 얘기 뿐이다. 샤리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복도를 총총히 뛰어오는 가정부와 마주쳤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겼어요?] [천만에요. 아주 근사한 일이...] 가정부는 눈을 빛내며 말문을 터뜨리려 했다. [내가 설명을 하지.] 어느새 모습을 나타낸 조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아버님 계신 곳으로 샴페인을 가져가요. 우리도 곧 합석할 테니까.] 조던은 샤리의 팔을 잡고 서재로 데려갔지만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앤더슨 의사가 약속을 어기고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렸을 리는 만무한데? [아버님과 앤이 지금 막 약혼을 발표하셨어.] 순간 샤리는 조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던 전 그것만은 허락 못해요.] 조던은 의외라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허락하지 못하겠다고?] [그래요. 허락할 수 없어요. 당신이 어떤 여자와 연애를 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에요. 하지만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건 삼가 주세요.] 샤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연애라구? 내가 앤하고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말인가?] 조던은 벌컥 화를 냈다. [샤리는 그가 화를 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네, 그래요. 조던 2,3주 전에 당신과 앤이 레스토랑에서 정답게 데이트 하는 모습을 봤어요.] [내가 앤과 함께 있었다고?] 조던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요.] [아, 그러니까 생각이 나는군. 분명히 나는 앤과 함께 있었어. 그러나 그땐 당신 아버지도 함께였단 말이야.] [아버진 안 계셨어요!] [아버지는 좀 늦게 도착하셨어. 나를 좀더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텐데.] 샤리는 그래도 의심스럽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가정하더라도.] [사실이야.] 조던이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비밀로 했죠?] 조던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대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어쨌든 당신은 또 떠날 생각인 거 같군.] [되도록 빨리 떠나려고 해요.] [그렇다면 더 이상 내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는 체념한 것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님이 약을 들고 깊이 잠드셨던 날의 일을 기억하겠지? 그날 아버님은 기억을 되찾으셨던 거야.] [아버지가 기억을 되찾으셨다고요? 그게 정말이예요?] 샤리는 눈을 번쩍 뜨고 다급히 물었다. [그렇소.] 조던은 무거운 어조로 수긍했다. 이것으로 마음에 걸리는 일은 죄다 없어졌다. 병환중인 아버지를 남겨두고 행방을 감추는 일이 마음에 걸렸었지만 아버지가 기억을 되찾으셨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떠날 수가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일은 어째서 그런 삭실을 몇 주 동안이나 비밀로 해왔단 말인가? [왜 그랬는 지 알아?] 샤리가 그 의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조던이 되물었다. 샤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나 피곤해서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뜻밖이군. 요즘의 당신은 무슨 일이든 환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한 가지 안 사실이 있어요. 문제의 벤 더스튼 기자란 매기의 남자친구였어요.] 샤리는 천천히 사실을 밝혔다. 조던은 휙 하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흠, 있을 법한 일이군. 난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 다른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어떤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죠?] 조던은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 [당신 일이야. 몰랐다고는 말하지 마.] [조던!] 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매기가 끈질기게 당신을 유혹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어요. 저는..매기의 일로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친구가 그런 여자라니, 참 한심할 뿐이예요. 왜 그녀의 그런 짓을 진작 알려주지 않았죠?] 마음이 흥분되어 입술이 마구 떨렸다.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당신은 계속 다른 일로 상처를 줬어요.] [일부러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 [안젤라 디바인과 바람을 피운 건 저를 상처받게 한 짓이 아니었나요?] 샤리는 비꼬듯이 물었다. 조던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주위의 모든 여성과 연애하는 줄 알아?] [안젤라와의 일만은 확실해요.] [앤과 나와의 관계도 오해했잖아.] 샤리는 조던의 반론에 홍당무가 되면서도 계속 말했다. [저는 밖에서 다 들었어요. 당신과 안젤라가 둘이서 여행 떠날 계획을...] 조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안젤라와 바람을 피운 적도 없었고 여행 계획을 세운 적도 없어! 사업 관계로 출장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겠지.] [절대로 그게 아니었어요.] [그럼 당신이 잘못 들은거야.] [그럴 리가 없어요. 단순한 출장계획이라면 내게 왜 숨겼죠?] [안젤라와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은 이안이었어.] [뭐라고요?] 샤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안젤라와 몰래 여행을 떠난 건 이안이야.] 샤리는 깜짝 놀랐다. 눈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그러나 언젠가 로라로부터 이안에게 배반당했던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사실이야.] 조던이 거듭 강조했다. [그럼 그때부터 주욱...] [주욱 어쨌다는 거야? 샤리, 당신이 그 대화를 엿들은 건 언제 일이야?] 조던이 샤리의 허리에 양팔을 감았다. 샤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에 이처럼 많은 쇼크를 받다니...그녀는 조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충격을 누르듯 눈을 감았다. [제가 아기를 잃은 날이었어요.] 조던은 격하게 신음하며 샤리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당신이 유산한 것은..그 때문이었나?]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네, 그래요.] [당신은 바보야.] 그는 샤리를 끌어안아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으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하마터면 난 당신마저 잃을 뻔했어.] [제가요?] [당신은 아기를 낳을 만큼 건강한 몸이 아니야.] 그는 샤리의 머리칼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그래서 당시은 침실을 따로 쓴 건가요?] 샤리는 그의 목덜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예요. 나는 한시도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내가 당신 곁에 있기 싫어했다고 생각하나? 나는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 그러나 같이 있으면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어.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내 자신을 억제하기가 힘들어..] [오 조던. 나는...] 샤리는 가슴이 미어져서 숨이 끊기는 듯 했다. [사랑하고 있어, 샤리.]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조던은 고뇌에 찬 눈길을 그녀에게 돌렸다. [가능만 하다면 당신을 방안에 가둬놓고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어. 아기에게 당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제가 집을 나간 것을 허용하셨잖아요.] [아..]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건강을 해쳐 병이 드는 것보다 내가 곁에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저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미련없이 보내는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당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럼 제가 만일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조던의 눈이 일순 냉정해지면서 얼굴은 험악한 형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저는 아기가 갖고 싶어요. 조던. 적어도 두 아이쯤은..] [당신은 자신의 몸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또 아기를 원하는 거야?] [그래요. 아기가 가장 소중해요. 그 무엇보다도...]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있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해.] 조던은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제 당신 없이는 살수가 없어. 샤리. 내 아내만 될 수 없을까?] [그럼 아기는요?] [절대로 안 돼. 당신을 두 번 다시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 당신을 잃지 않을까 공포에 떨면서 9개월을 산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니까! 5년 전에 나는 하마터면 알콜 중독자가 돼 버릴 뻔했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것이 명백했다. 조던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을 그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5년 전에 그가 냉소적인 가면 안에 그 격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 아직 어리기만 했던 열 여덟살 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는 내가 임신하고 있을 동안 도저히 그 고통을 견뎌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샤리는 살며시, 그러나 단호하게 그의 팔에서 몸을 뺐다. [당신에게 돌아갈 수는 없어요, 조던.] 그녀는 내심의 동요를 억제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조던은 힘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자주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지금은 그 사랑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나?] 가엾은 조던.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속으로만 감정을 삭이는 조던을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조던은 고뇌가 가득 찬 잿빛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너무 늦었나?] [네, 그러나. 언젠가 장래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 줘.] [그게 아니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8개월만 정도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당신을 알고부터 5년이나 지났어. 이젠 나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지 없는지 당신도 알고 있을꺼야. 덧없는 기다림은 나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아버지께서 회복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건배를 한 다음 내가 이 집을 나가겠어.] 조던은 마음속에 숨어있던 한 부분이 소리도 없이 파괴되어 버리는 듯한 비통함을 애써 눌렀다. [왜 아버지가 회복한 사실을 비밀로 했나요?] [당신과 새 출발할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야. 아버지는 아직도 당신이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줄로 믿고 게셔. 별거하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야. 그래서 두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다시 한번 시험해 보는 일에 찬성해 주셨던 거야. 그러나 나도 당신 아버지도 착각을 했던 것 같아. 당신은 이 집에 그래도 남아. 내가 나갈 테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샤리는 당황해서 그를 만류했다. [저는..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셈이니까요.] [아버님께서 허락하실까?]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을 셈이예요, 조던.] 샤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허락도 말이지?] [네.] [당신에게도 정리할 만한 여유가 필요하겠지. 자, 그럼 아버님과 앤을 위해서 마지막 연극을 합시다.] 조던은 마음을 달래려는 듯 가슴을 폈다. [조던!] 샤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만..] 그는 조용하게 손가락으로 샤리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며 격한 포옹과는 달리 부드럽게 키스했다. 시간은 달팽이의 걸음처럼 지루하게 지나갔다. 샤리는 이번에는 무사히 순산할 수가 있었다. 샤리가 입원 중에 문병을 와 준 것은 로라뿐이었다. 그녀는 이안에게까지도 샤리의 비밀을 지켜 주었다. 아버지에게는 자주 전화를 걸어서 걱정을 안 끼치도록 노력하였다. 아버지가 앤과 재혼한 덕택으로 샤리는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언제 여행에서 돌아오느냐고 성화를 부리는 일만은 그만두게 할 수 없었지만. 조던은 거의 미친 듯이 일에만 자신을 쏟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의 고통도 드디어 끝나는 날이 왔다. 샤리는 병원에서 집을 향하여 곧바로 택시를 달리게 했다. [어머, 아씨!] 가정부는 문을 열고 샤리를 보자 몹시 놀라더니 샤리가 바닥에 내놓은 가방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아주 돌아오셨군요.] 큰 소리가 났다. [그래요.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닌걸.] 샤리는 방긋 웃었다. [따라와서 좀 도와줘야겠어요.] 가정부는 영문도 모르는 채 샤리의 뒤를 따랐다. [제가 하겠습니다. 부인께선 아직 힘든 일은 무리라고요.] 택시 운전수는 샤리를 말리며 뒷좌석에서 요람을 들어내어 재빨리 거실까지 날라다 주었다. 샤리는 운전수에게 팁을 듬뿍 주고 가정부를 돌아보았다. 마크로드 부인은 넋을 잃고 요람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라셨죠?] 샤리는 웃으면서 물었다. [놀랐냐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마크로드 부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안절부절 했다. [30분 정도 애를 봐줄 수 있을까요. 사무실에 가서 점심시간에 맞춰 그이를 모셔올테니까요. 점심때는 파티를 열어요. 우유 먹일 때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앞으로는 아기를 봐달라고 자주 부탁하게 될 것 같아요.] 샤리는 웃으며 말했다. [아씨..] 마크로드 부인은 목이 메었다. [알고 있어요. 그럼 30분만 부탁하겠어요.] 느닷없이 찾아온 샤리의 모습을 보고 비서인 자네트도 가정부 못지 않게 놀란 듯 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로드 씨에게 알리겠어요.] 그녀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두세요. 그이를 놀래켜 주고 싶으니까.] 샤리는 버저를 누르려는 비서의 손을 멈추게 했다. [그이를 점심 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갈 거예요. 그러니까 오후의 약속은 죄다 취소해 주세요. 그리고 전화도 받지 않으시도록 부탁해요.] [괜찮을까요?] [제가 부탁한 대로 해주세요. 자네트.] 샤리는 살며시 조던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저렇게 야위다니! 양쪽 볼의 옴푹 들어간 부분이 조던을 더욱 날카롭게 보이게 했다. 모두가 내 탓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샤리...] 그는 천천히 일어났지만 눈에는 뜨거운 격정이 번들거렸다. 샤리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저 눈에 떠오른 격정이 그가 숨기고 간직했던 사랑인 것이다. 지금 나는 저 사랑을 마음껏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오랜만이예요, 달링.]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조던은 긴장하는 듯 했다. [달링이라고?] 그는 넋이 빠진 듯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그래요, 조던!] 샤리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두 팔을 그의 웃옷 밑으로 집어넣어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그의 가슴의 고동소리가 드럼을 치듯 강하고 빨라졌다. [아아..보고 싶었어요.] 조던은 미친 듯이 샤리를 꽉 안았다.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샤리? 느닷없이 행방을 감추다니, 나를 미치게 할 셈인가?] [어디 있었는지 나중에 알려 드릴께요.] [지금 당장 가르쳐 줘.] [지금은 안 돼요. 이제부터 집에 가서 점심을 해야 되니까요.] [집이라고, 우리의 집 말이오?] [네 그래요.] 샤리는 그의 손을 잡고 문쪽으로 이끌었다. [마크로드 부인이 점심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우뚝 발을 멈췄다. [이건 무슨 연극이지, 샤리? 또 나와 함께 살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볼 셈인가? 그렇다면 난 사양하겠어. 또다시 당신을 잃을 경우라면 나는...] 그의 목소리가 깊은 고통으로 조용히 떨려 나왔다.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조던. 당신을 사랑해요.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증오한다고 믿고 있을 때도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믿어지지 않는군. 하지만 당신은 너무도 쉽게 떠났어.] [거기엔 사연이 있었어요. 집에 가서 다 말씀 드리겠어요.] 샤리는 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시험하는 거라면 더 이상..당신을 사랑해. 샤리!] 그는 숨가쁘게 외치고는 샤리의 입술에 오래도록 격한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하는 샤리...] 그는 고삐가 풀린 듯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집으로 가요.] 샤리는 낮은 소리로 재촉했다. [당신이 내 집에, 아니 우리 집에 . 정말 나의 아내로 다시 돌아온 건가?] [물론이예요, 조던.] [그렇다면 어서 갑시다.] 두 사람은 사무실을 뒤로 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 정말 꿈은 아니겠지, 샤리?] 차에 오르자마자 조던은 다시 물었다. [그래요, 조던. 당신이 나를 아무리 떼려고 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는 좋은 아내가 되겠어요. 당신도 내게서 절대 떨어질 수 엇을 만큼. 됐죠?] 샤리는 행복한 듯 속삭였다. [돌아가서 그 증거를 보여주겠소?] 샤리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계획이 있어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점심을 나중으로 미뤄도 되잖아.] [점심이 아니예요.] [그럼 뭐야.?] 샤리는 손을 뻗쳐 그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그건 그 다음의 즐거움이예요.] 조던은 초조한 듯 한숨을 토했지만 그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미리 집에 전화로 모든 사정을 설명해 둘 것을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미 때가 늦었다. 두 사람이 집에 당도했을 때,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고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마크로드 부인이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지!] 조던은 너무 놀란 듯 그 자리에 못박혀 버렸다. [괜찮아요, 달링. 자 당신의 아들과 첫 대면을 하세요.] 샤리는 그의 팔을 이끌며 재촉했다. [내 아들이라고?] [그래요.] 샤리는 폭신한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가정부의 손에서 받아들ㄹ어 조던의 품안에 살며시 안겨 주었다. [전 주방에 가 있겠어요.] 마크로드 부인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서 나갔다. [샤리, 나는..이 애는...] 조던은 행복에 겨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당신 아기예요.] 샤리는 아기의 , 조던과 꼭 닮은 검은 머리와 강인해 보이는 입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기는 아빠인 조던을 빼쏜 듯 했다. 조던은 어색하게 아기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당시이 나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을 때 이 애가 이미 당신 뱃속에 있었던 거군. 당신은 알고 있었지?] [그래요, 조던. 미안하게도 당신을 또 놀라게 해줄 일이 있어요.] 샤리는 미소짓듯 그를 바라보면서 요람 위 몸을 굽혀 두 번째 아기를 안아올렸다. [쌍둥이인가?] 조던은 숨을 죽였다. [당신 딸이예요.] 샤리는 핑크빛 포대기에 싸인 계집애를 내밀었다. [이것 참! 일이 이렇게 되도록까지 한마디도 귀뜸을 해주지 않았다니.] [당신이 괴로워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예요. 이해해 주세요, 조던.] [그래서 당시은 혼자서 그 고통을 겪어냈단 말이야? 나를 그렇게 겁쟁이로 알았나?] 팔에 안긴 아기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자기 혐오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은 절대 겁쟁이가 아니예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난 조금도 괴롭지 않았어요. 8개월 간 침대에 누워 안정을 했기에 아기를 순산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가 보고 싶어 번민했던 나날의 고통을 샤리는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거짓말은 안 해도 돼, 샤리] 역시 그는 속지 않았다. [애들 이름은 뭐라고 지었지?] 그가 애정이 담긴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름은 없어요. 중요한 일이라서 이름만은 나 혼자 지을 수가 없었어요.] [그거 고맙군. 아기를 바꿔 안아볼까? 갑자기 딸애가 안아보고 싶은걸.] [사실은요, 조던! 당신만 좋다면 딸은 조나단이라고 짓고 싶어요.] 아기를 잃었던 일이 생각나 일순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당신이 그 이름을 원한다면 나도 좋아] 그는 밝은 표정으로 선뜻 대답했다. [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그대신 아들의 이름은 당신이 짓도록 하세요.] 샤리는 생긋 웃었다. [잘 생각해 보기로 하지, 이름이란 평생 따라 다니는 것이니까. 이크, 샤리..] [기저귀를 갈아 줘야겠네요.] 샤리는 킥킥 거리며 웃었다. [지금부터 기저귀가는 법을 시험해 보일께요.] 샤리는 안고 있던 사내아이를 요람으로 옮겼다. 그느 일어서서 딸을 샤리에게 넘겨 주었다. [원 이렇게 작아서야..좀더 커지면 축구를 가르쳐 줘야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전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에게 전화하시려는 거죠?] 샤리는 능숙한 솜씨로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물었다. [당신 아버지한테야. 할아버지가 된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계시지?] [네. 당신한테 제일 먼저 알렸으니까요.] [당신은 아이들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나?] [왜요, 질투나세요?] 샤리는 놀려댔다. [아, 미칠 것만 같아.] 그도 웃으며 샤리를 끌어안았다. [당신, 약간 건방져졌는 걸. 몸조리 끝나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조던, 아직은 안 돼요.] [알고 있어.] 그는 샤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을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달링.] 배가 고픈지 계집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자 뒤따라 사내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이 애들은 점심 때를 못 기다린다고요.] 샤리는 블라우스를 풀어헤치며 말했다. [2분간만 기다리게 해. 먼저 나한테 키스하게 해 줘.] 조던이 잠긴 목소리로 청했다. [조던!] 샤리의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너무 오래 됐어. 어서 보여 줘.] 그가 보채듯 말했다. [아. 샤리.. 당신에게만 고생을 시켜서 정말 미안해. 나는 정말 겁쟁이야.] [사과만 하지 말고 어서요.] 부드러운 젖가슴에 키스를 받자 샤리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이제 겨우 같이 있게 된 걸요. 난 그 사실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하지만 너무 괴롭군.] [저도요.] 말과는 달리 샤리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의 남은 많은 날들을 그의 팔에 안겨 잠들 수 있는 것이다. ♧